겨울 숲을 걸으며 산을 둘러보고 있는 아이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지 못한 지 오래다. 가끔 서너 명이 모여도 마스크 너머로 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웃을 만나도 인사하기 조심스럽고, 반갑게 인사 나누기 미안하다. 답답함이 가슴을 누를 때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사람들의 소리가 줄어든 요즘, 자연의 소리가 더 선명하다. 바람 부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새 소리. 아이가 물 흐르는 소리가 좋다며 개울 옆에서 귀를 기울였다. 조용히 있으니 박새가 물가 바위에 낀 이끼를 부리로 뒤집어 가며 먹이를 찾았다. 어쩜 이끼를 뜯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끼는 요즘 가장 신선한 식물 중 하나일 테니까. 빨간 찔레나무 열매가 아직 남아있었다. 껍질이 딱딱하고 푸석한 것이 새들에게도 맛있는 열매는 아닐 것이다. 

그 덤불 속에 참새 한 마리가 날아오나 했는데, 오랜만에 보는 노랑턱멧새였다. 눈썹선과 부리밑이 노랗고 닭 벼슬 같은 머리깃털이 있어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새이다. 인기척을 듣고 어디로 날아갔는지 찾고 있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또 날아왔다. 노랑턱멧새 암컷이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수컷을 기다리는 모습이 집에서 아이들과 아빠를 기다리는 그 모습과 비슷했다. 새 한 쌍이 내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작은 새들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견뎌낼까 걱정되지만, 지금까지 몇 대에 거쳐 이곳에서 살아온 새들이다. 지금 가장 위태로운 건 사람들이다. 너무 자주, 멀리 다니는 것이 문제가 된다. 텃새처럼 한 지역에 오랫동안 대를 이어 살아가는 동물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몸으로 알고 있다. 생명과 연관된 그 이상의 위험은 무릅쓰지 않는다. 

나뭇잎과 풀잎이 모두 사라진 숲에서 한 번의 시야에 여러 마리 새가 들어왔다. 용감하게 날아다니는 까치 외에 색으로 구별되는 새들은 없다. 어쩜 새들이 숲과 똑같은 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숲에서 소리와 작은 움직임으로 새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나무를 쪼는 소리를 따라가니 쇠딱따구리가 보였다. 높은 나뭇가지에 있는 쇠딱따구리는 아래에 사람이 아무리 오랫동안 자기를 관찰하며 이야기하고 웃어도 아랑곳 않고 계속 자기 일을 했다. 한참을 보고 있는데도 쇠딱따구리를 찾지 못한 아이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시선의 각도를 맞춰보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도 새를 찾지 못했다. 
 

산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솜털 같이 가벼운 새 깃털

처음 숲에서 새를 찾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필자도 다른 사람들이 다 찾는 새를 혼자 찾지 못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작은 곳만 보면 새를 찾을 수 없다. 넓게 보면서 움직임을 찾아야 크고 복잡한 숲에서 작은 새를 찾을 수 있다. 아이에게 넓게 보는 방법을 천천히 가르쳐 주어야겠다. 또 다른 움직임이 보였다. 동고비는 거의 나무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왔다갔다 반복했다. 박새와 곤줄박이, 오목눈이는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풀씨를 찾아 먹고, 나뭇가지를 두드려 그 사이에 잠을 자는 거미나 곤충들을 찾는다. 풀밭에서 참새들의 군무가 진행 중이었다. 이쪽에서 파드득, 저쪽에서 파드득, 아이들도 함께 신이 났다. 까치가 나뭇가지 위에서 뭔가를 쪼고 있었다. 한참을 쪼고 나서야 아래로 떨어트렸다. 사마귀 알집이다. 가운데 구멍을 내고 알을 모두 먹었다. 참 똑똑하다. 사마귀 알집이 스펀지 같은 것도, 그것을 까치가 겨울 양식으로 먹는 것도 아이들에겐 너무 신기했을 것이다. 

겨울 동안 새들은 빽빽한 작은 나무들 사이에서, 풀숲에서, 잣나무 같은 상록수의 좋은 은신처에서, 나무뿌리와 땅 중간쯤에서, 또는 인가 처마 밑에서 추위를 피해 잘 지낼 것이다. 지금도 까치들은 아파트 바람을 피하기 좋은 조경수 나뭇가지에서 잠잘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한 깃털 옷을 입고 말이다. 자연 그대로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언제나 잊곤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작은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 스스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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