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제법 많이 돌려 코로나19 초기 때로 가보자. 당시만 해도 확진자가 간헐적으로 발생해 위기 경보 단계가 심각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하지만 한 종교 내 집단감염을 시작으로 전국 확산세에 이르자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란 생소한 단어와 직면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이제는 단계를 붙였다. 확진세에 따라 단계를 오가니 뭐가 뭔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거리두기 단계와 무관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은 자기 방역에 최선을 다하라는 주문만 외우면 됐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분명했다. 아이들의 학습권이, 중소상인들의 생존권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그저 방역만 잘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가 확진세에 따라 강약 조절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종식 될 때까지 강경노선을 펼쳤다간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상황을 감안하면 제 아무리 제갈공명이라 해도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답안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 아닐까.

그럼에도 정부가 거리두기 단계를 상향하면 경제가 붕괴되니 하며 언론은 경제 걱정에 여념이 없다. 그런가 하면 하향조치하면 너무 안일했다고 또 비난에 열 올리는 언론도 여럿이다. 자세히 보면 같은 언론사에서 상황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어 보인다. 

언론이 자기부정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사회도 편을 나눠 각각을 탓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확신한 자신은 없지만 누가 고의성을 갖고 전염병을 확산시키겠나. 누구라도 정부가 정한 사회적 거리두기 규칙을 온몸으로 거부하겠는가. 물론 특정 집단 극소수의 사람의 이탈행위가 언론을 통해 들리긴 해도 대다수 사람은 사회적 약속을 지킬 정도의 상식과 양심을 갖고 산다고 믿고 싶다.  

그럼에도 언론은 연일 정부의 방역에 대해 쓴 소리를 퍼붓고 있다. 잘못 하는 것을 잘못한다고 한다기보다는 잘못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더 간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친구의 잘됨을 시기 질투하는 초등학교 저학년의 모습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코로나19는 냉정하다. 그간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순들을 여과 없이 들춰내고 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복지사각지대는 여전히 존재했으며, 풍성한 줄만 알았던 우리 사회 정의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진정 코로나가 두려운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두려움과 맞설 수 있는 힘은 서로를 탓하고 제도를 부정하는 자세는 아닐 것이다. 지금은 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사회가 만든 규칙이 아무리 모났다 해도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도 일정 부분 양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잘못만 들추고 ‘이탓저탓‘만 하는 언론의 목적은 한가지뿐이다. 사회를 위하기보다는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 말이다. 이를 두고 흔히 정치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전염병이 예상보다 오래가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갈지 모른다. 지금보다 상황이 심각해질 수도 있을 것이며, 그럴 때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힘겨워질 것이다. 힘겨운 마음에 사회를 탓해 보고, 이웃을 질타해보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지다. 견제와 감시란 단어로 포장된 그럴 듯한 글들에 눈 멀고 귀 먹지 않았으면 한다. 

‘찌라시’라고 한다. ‘기더기’라고도 한다. 우리 사회가 언론을 얼마나 표독스러운 집단으로 보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본다. 언론은 사회를 밝히는 등불이라고도 했다. 코로나 시국에 언론이 진정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시민들의 관심과 혹독한 타이름이 필요해 보인다. 시민 곁에서 함께 옳은 길을 찾는 진정한 언론이 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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