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유수 이덕형(李德泂)이 지은 수필 ‘송도기이(松都記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선조대왕은 시나 서화에서도 모두 묘법을 얻었는데 매양 한호(韓濩)의 필적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세상에 드믄 특출한 재주다. 이 조그마한 나라에 이런 기이한 재주가 태어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 중국에서 글씨를 잘 쓴다고 이름난 자도 역시 한호의 글씨를 보고는 놀라고 감탄하여 마지않으면서 평가하기를 “목마른 고래가 구명을 들어가는 것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 글씨의 힘이 웅건함을 말한 것이다. 
 

초당 허엽 선생이 쓴 신도비.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 있다.

이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사 가서 석봉(한호의 호)의 이름은 천하에 전해졌다』고 하였으며, 한호 스스로가 말하기를 “내가 평생 힘을 드린 글씨는 서화담(서거정)의 비석이다”라고 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 글씨는 안평대군 이후 한호의 서법으로서 첫 한석봉이 쓴 초당선생 허엽신도비째로 삼는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뿐 아니라 대동야승 죽창한화(竹窓閑話)에는 “한호는 송도사람으로 호는 석봉이다. 필법이 힘차고 아름다워 기이한 체(體)를 얻었는데 그의 아들과 아우로서 한호의 필적을 간직한 자가 있으면 모두 부관(수령)에게 빼앗겨서 글자하나 종이 한 쪽을 보존한 자가 없다. 그래서 그 아들이 수령을 보면 슬퍼하고 분하게 여기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닌가?”라고도 하였다. 

이처럼 당대에서도 크게 선호하였던 글씨로 이름난 한호의 육필이 용인에 딱 하나 전한다. 초당선생 허엽의 신도비인데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 있다. 더욱이 비문은 조선조 명신(名臣), 노수신(盧守愼)이 짓고 전액(篆額)은 남응운(南應雲)이 썼는데 모두 정승의 반열에 있었던 쟁쟁한 학자요, 명신들이니 어찌 귀하고 놀랍지 않으랴.

그러니까 이 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선조 15년(1582)에 세워진 것이니 지금으로부터 438년이나 된 것으로 보물급에 가까운 유물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문은 풍마우세로 거의 판독이 어려울 지경으로 퇴락해 가고 있는데도 문화재보호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용인시 관계 부서에서는 이런 문화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지 묻고 싶다.

이외에 한호의 필적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용인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중회 묘비 전면 종액의 글씨인데 이것은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긴 것이다.

이와 같이 후세 사람들도 한호의 글씨를 선호하였을 뿐 아니라 선조대왕은 “이 조그마한 나라에서 이런 기이한 재주가 태어날 줄 몰랐다”고 극찬하였고, 중국에서 글씨를 좀 쓴다는 사람들도 한호의 글씨를 사 가면서 “놀라고 감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하였으며 수령들은 자손들의 집을 뒤져서 글씨를 빼앗아 갔다. 그와 같은 필적이 440여 년 풍상을 겪어 오면서 전해오고 있는 이 문화유산을 방치하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대학 교수 중심으로 꾸려졌다는 용인시문화재 위원님들 제발 용인 향토문화 보호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이처럼 곤곤소소 조락해가는 귀중한 향토유산에 비각이라도 세워 보존할 수 있도록 폭 넓은 안목으로 한번 살펴 봐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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