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란 전세계적인 유행을 의미한다. 어원을 살펴보면 그리스어로 pen은 모두를 뜻하고, Demic은 사람들을 뜻한다. 그래서 팬데믹(pandemic) 하면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전파돼 모든 사람이 감염됐다는 뜻이다. 이는 환경파괴로 터전을 잃은 바이러스가 인간세상을 돌고 돌아 온세상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앞으로의 시대는 BC(팬데믹 이전)와 AC(팬데믹 이후)로 구분해 21세기 전후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야기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대변동>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위기에 처했을 때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물었다. 개인이든 국가든 압력을 받으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정직하고 자세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 미래 석학들이 인간의 미래를 책, 기후, 과학의 위기, 신종감염, 그리고 테러와 이민 문제라고 일컬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국가나 개인이나 변화를 요구하는 내·외부적 압력에 성공적으로 대처하기 우해서는 선택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특히 팬데믹 이후 시대에는 사회 전체가 좀 더 날렵하고 유연한 사회가 되기를 요구하리라고 한다. 낯선 문화로의 이행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또다시 나 자신을 몽땅 바꿔야 하는 세상이 온다면, ‘내 정신적 삶에 대한 균형감각을 얼마나 더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어디까지, 얼마나 나 자신의 능력과 잠재력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조여 온다. 살아보지 않은 날들에 대한 두려움인가? 아니면 인공지능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져서인가? 즉, ‘Make Knowledge(지식 창조)’이다.

지식만이 생존과 번영에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시대가 왔다고 한다. 창조와 혁신을 통해 쌓은 새로운 지식이 길라잡이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재화나 서비스는 어느 한 사람이 이용하면 다른 사람은 포기해야 하지만, 지식은 수백 수천 명이 함께 사용해도 닳아 없어지지 않을뿐 아니라 오히려 더 단단하고 날카로운 무기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나의 미래도 바뀔까 두렵게 살아온 나에게, 내 나이에 맞게 살고 싶은 것조차 머나 먼 나라의 동화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린 듯하다. 어차피 인생살이 ‘새옹지마’고, 세상사에 대한 책임은 인간이 태어날 때 두 어깨에 메고 태어난다고 하니,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뜨리라는 소망을 품어보면 스스로를 달래본다.

왠지 어려울 때마다 습관처럼 고흐의 ‘절규’가 떠오른다. 미친 듯 바람찬 언덕 위 광야를 헤매며, 보다 나은 내일의 꿈을 이루고자 노력했던 자아 목표를 향한 그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치유의 스토리를 만들어 낸 먼 나라의 화가를 떠올리며 ‘서늘한 분노’로 가득 차오르는 팬데믹을 고흐의 ‘바람 부는 언덕 위’로 휙~ 날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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