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의 날 특집]인생3모작 서석정(81) 선생

1939년 12월 13일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방아리 아리실. 밤이 되면 까만 하늘에 별이 빼곡히 박히고 가을엔 높디높은 하늘이 광활하게 땅에 맞닿던 아름다운 마을에서 서석정 씨는 태어났다. 
6대째 이어온 깊은 개신교 신앙은 서씨 집안의 자랑이었다. 그런 집에서 그는 부모님 말씀이라면 잠자코 따르던 순종적인 아들로 자랐다. 

운명처럼 만난 풍금, 인생을 바꾸다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교회 여름성경 학교가 열렸다. 한국신학대학에서 왔다는 교사는 교회 풍금을 그렇게 멋들어지게 칠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그 광경에 서씨는 홀딱 반하고 말았다.  
평소 부모님께 뭔가 하고 싶다 졸라본 적 없는 서씨였다. 하지만 그런 아이가 지금이 운명을 가를 중요한 때라는 걸 알았던 걸까. 아침 저녁 어머니를 쫓아다니며 “나도 풍금을 배우고 싶다”고 졸랐더랬다.  

“선생님 우리 집에서 점심 한 번 대접해드리면 안되겠느냐 쫓아다니며 귀찮게 해드렸지. 악보 보는 법이라도 배우겠다고 그 난리를 피웠어.”

부지깽이(아궁이 연료가 잘 타도록 들쑤시던 긴 막대기)로 매를 맞아 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부모님을 설득해 결국 선생님께 악보 보는 법을 배우게 됐다. 그때부터 서석정씨는 밤늦도록 교회에서 풍금을 쳤다. 찬송가 1장부터 600장까지 6달 만에 달달 외웠을 정도다. 

“어린놈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텅 빈 교회에서 등잔불 하나 켜놓고 풍금을 울렸지. 지금도 몇 장 쳐봐라 하면 바로 나와. 그 정도로 연습을 한 거야.”

온 나라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등잔불 등유 한 방울도 아껴야 하는데 교회를 지켰던 어르신마저도 어린 서씨를 구박은 할망정 막아서진 못했다. 그렇게 연습해 얻은 능력은 서씨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놨다. 

어느 날 아버지 사촌이자 서씨가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던 집안 어른이 서씨의 아버지를 찾아와 “형님, 풍금을 아무나 잘 칠 수 없으니 석정이 음악대학 보내죠” 제안했다. 그 한마디 덕에 그는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에서 꿈에 그리던 음악을 공부하게 됐다. 국내 유명 음악가들을 스승으로 만나 정식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1950년대 음악을 전공했으니 평범치는 않았지. 시골에서 태어난 내가 기적처럼 음악을 만난 거야.”
 

그러나 세상살이는 참 녹록치만은 않았다.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 영장이 나왔다. 논산훈련소에 들어가 훈련을 마친 서씨에게 군의관은 몸이 너무 약해서 안 된다며 ‘귀향증’을 쥐어줬다. 천성적으로 약했던 폐가 문제가 된 것이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좀 창피해. 그 때만 해도 군대에 간다고 하면 온 마을에서 잔치를 벌이고 보냈거든.”

나라를 위해 당연히 희생해야할 이 한 몸을 바치지 못했다는 설움은 컸다. 서씨는 어쩔 수 없이 친척집인 서울 미아리고개에서 머물며 학교로 돌아갔다.  

“미아리고개를 넘어 정릉에 있는 학교로 가는데 걸어다니기에는 좀 먼 거리였어. 목이 마르면 잠시 멈춰 서서 냇물을 마시며 학교에 다녔지. 근데 거참 신기하게 밥맛이 좋아지고 병이 싹 나았어. 하늘이 도우신거지.”

건강을 되찾자 서석정씨는 바로 자원해 군대에 입대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를 지키는 일은 그에게는 당연한 의무였다. 군의관은 이번에도 퇴짜를 놨다. 서씨가 “오늘 죽어도 좋으니 받아만 달라”고 사정하자 절대 안 된다며 허락할 기미를 보이지 않던 군의관도 결국 입대 허가 도장을 찍었단다. 

“그렇게 들어갔는데 몸이 아프니 적당히 하자며 웅크리면 되겠어? 병과 싸워서 이기자는 마음으로 죽어라 훈련에 임했지. 그러다 군인교회에 가게 됐는데 오르간이 있는 거야. 거참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 않아.” 

오르간으로 찬송을 다 외워 연주하는 서석정씨를 본 군목은 “나랑 근무하자”며 그를 이끌었다. 서씨는 이때를 설명하며 ‘하나님은 반드시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찾으시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신다고 하셨다’는 성경 구절을 읊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몸이 약한 서씨가 군대에서 온전히 모든 훈련을 받았다면 견뎌내기 힘들었으리라. 그의 진심이 하늘에 닿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태어나도 교사할 거야. 
사람 만드는 교사”  

무사히 제대 후 교사로서의 새로운 삶은 시작됐다. 그는 1967년 가평중학교 음악교사로 3년여 근무한 기간을 제외하곤 줄곧 고향 용인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2005년 남사중학교 초빙교장까지 무려 38년의 교단생활이었다. 

그는 용인 지역 10여개 학교의 교가를 작곡한 작곡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남사중, 용신중, 소현중, 구성중, 죽전고, 백현고 등은 지금도 서석정씨가 작곡한 기개 넘치는 교가를 부른다. 그는 “지금도 자다가도 문득 악상이 떠오르곤 한다”고 말했다. 

몸담은 학교에서는 대부분 학생과장을 맡았다. 이른바 ‘문제 있는’ 학생들은 모두 서씨 차지였다. 그러나 서씨가 보기에 아이들이 하나 같이 귀하고 귀했다.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 학생은 없어. 문제 있는 환경 탓이지. 아무리 탈선을 했어도 내 손에 들어오면 모두 제자리를 찾았지. 그런 아이들이 그저 고마웠어.”

그러다 용인여고 한 학생을 만났다. 수업 도중 다른 아이들이 공부할 수 없게 방해를 하고 지독히도 말썽을 피워 학교에서도 소문이 파다하게 난 학생이었다. 담임교사마저도 “저 아이는 못맡겠다”며 포기할 정도였단다.

“가정환경이 온전치 않은 아이…. 교사들이 오죽하면 전학을 보내라며 포기할 정도였어. 그런 아이를 바로 잡아주려고 주변에 알아보니 어렸을 적에 무용을 그렇게 잘했다고 하더라고.”

서씨는 당장 학생을 불러다 “선생님이랑 무용하러 다니자”고 제안했다. 서씨가 평소에 합창단을 꾸리며 병원이나 요양원, 노인정을 찾아다니며 봉사를 하고 있던 차였다. 음악에 맞춰 학생이 춤을 추면 몸과 마음이 힘든 환자와 노인들은 몸을 들썩이며 큰 호응을 보였다. 
 

“선생님 다음엔 어디가요.” 

“학교 쓰레기 제가 치울 게요.” 

불러도 대꾸 한 번 안했던 아이가 먼저 봉사하러 가겠다고 나섰다. 자신을 세워준 스승의 공간인 음악실엔 꽃꽂이를 해놓고 피아노를 광이 나게 닦아 놨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아이가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는 존재 이유를 찾은 것이다. 아이는 서석정씨의 추천으로 학교와 지역에서 각종 표창장과 봉사상까지 휩쓸었다. 

서씨는 아직도 그 아이의 졸업식날을 잊지 못한다. 그의 어머니는 음료수 한 박스를 들고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자식의 스승에게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했다. “우리 딸 선생님 덕분에 졸업했어요.”

그때를 회상하던 서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하다. “지도자란 무엇이냐.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다시 교사를 할 거야. 사람 만드는 교사.” 

한번은 학교 공납금도 제대로 못내는 학생을 맡은 적이 있다. 1960년대 지긋지긋하게 가난했던 시절이다. 아이가 무슨 죄일까. 아버지는 작은 양복점 하나 운영하는데, 어머니는 중풍으로 드러눕고 노부모까지 모시는 집이었다. 서씨는 아이를 불러다가 “학교에 늦게 와도 좋으니 조간 석간신문을 돌리며 아르바이트를 하라”며 다독였다. 그가 스스로 살 길을 찾도록 도운 것이다. 고되고 힘들만 한데 내색 한 번 않고 묵묵히 버티던 아이는 이제 70이 가까웠다. “지금도 곧잘 찾아와. 오면 꼭 큰 절을 하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 마음이 아파서 뭐라도 해주고 싶어도 꾹 참고 지켜봤는데 스스로 딛고 일어 선거야.”

끈질긴 봉사, 멈출 수 없는 나누는 삶

40여년 교사 인생을 살던 그가 또 하나 집착이라 할 만큼 지속해왔던 일이 있다. 바로 가로등을 끄는 일이다. 지금이야 중앙통제시스템을 통해 가로등을 자동으로 켜고 끌 수 있지만 과거엔 그렇지 않았다. 가로등은 해가 지면 꼭 필요한 존재지만 해가 뜨고 나면 아까운 전기를 먹는 하마나 다름없었다. 가난한 시민들의 소중한 세금이었다. 누구보다 그걸 잘 알았던 그가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그는 해가 뜨면 동네 모든 가로등을 끄러 다녔다. 

10여년 넘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가로등을 껐으니 죽을 뻔한 경험도 여럿 있었다. 동장군도 얼어 죽을 추운 겨울엔 가로등을 다 끄고 돌아오면 손발이 다 얼어 동상에 걸렸고 전깃줄이 떨어져 감전이 된 적도 있다. 하루는 뾰족한 기둥에 눈을 찔려 피를 철철 흘리며 출근한 적도 있단다. 또 하루는 고장 난 자전거 제동장치 때문에 가로등 바로 앞집을 들이 받아 사고를 당했다. 기다시피 간신히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다쳤다고 말하니 사색이 된 남편을 아내는 아무 말없이 어루만졌다. 자기 몸 돌보지 않고 일하는 것도 모자라 새벽 같이 일어나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가는 남편이 좋기만 했을까. 하지만 서씨의 아내는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정말 교사요. 당신은 정말 애국자요’ 늘 그렇게 나를 존중하고 아껴줬지. 우리 마누라 같은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그런 사람 없어.” 

서석정씨가 긴 세월 하루도 빠짐없이 가로등을 끌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그의 아내 덕으로 볼 수 있다.   

40여년 교사생활을 마친 그는 쉼을 택하지 않았다. 1972년 교단에 있을 당시부터 시작했던 봉사활동은 퇴직 후 더욱 왕성해졌다. 복지관, 법무연수원, 경로당, 학교, 병원을 찾아다니며 인성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각종 악기와 노래, 특유의 입담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 인기 강사였다. ‘웃음전도사’ 사람들은 노년의 그를 그렇게 불렀다.   

“왜 그런지 사람들 앞에만 서면 가슴이 두근거리지. 내가 아코디언을 들고 목청껏 노래를 가르치면 사람들이 자지러졌어. 어떤 할머니는 웃다가 뒤로 넘어지기도 했지.”  

그런 서씨에게 위기는 또 찾아왔다. 2011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3개월 간 병원에서 꼼짝도 못하게 된 것이다. 서석정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병원 두 곳을 갔는데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뇌경색 때문에 앞이 보이질 않는데 우리 딸이 잘 보는 병원이 있다며 데리고 간 곳조차도 ‘시력이 돌아오긴 힘들 겁니다’ 하는 거야. 그래도 고쳐달라고 딸이 우는데 의사가 그러더라고 ‘밑져야 본전인데 한번 입원해 봅시다’”

그 시기 그가 믿는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한 것은 하나였다. “눈 뜨게 해주시면 제 여생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그리고 한 달, 그는 눈을 떴다. 모두들 기적이라고 했다. 

“나는 반드시 할 수 있어. 이 세상 태어난 것도 감사한데 아픈 몸이 완벽히 나았으니 베풀어야지. 죽는 날까지 사람답게 살고 가고 싶어.”  

서석정씨는 지금도 꿈을 꾼다. 시민들을 만나 민주시민의 긍지와 사명감을 알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는 시민들을 모아 놓고 무료로 강의를 하고 싶다고 했다. 

“깨어 일어나라 외치고 싶어. 자기가 가진 달란트(각자 타고난 자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를 남을 위해 쓰라고 말해주고 싶어. 내가 느꼈던 이 행복을 모두 느꼈으면 좋겠거든.”

그의 어조는 강했다. 스스로에게 끝까지 나누다 가겠다고 다짐하는 것 같았다. 아니다. 간절했다. 나누는 삶이 행복하다는 진리를 세상에 더 알리고 싶다고, 마지막까지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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