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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의 추억
  • 송미란(생태환경교육협동조합 숲과 들 생태활동가)
  • 승인 2020.02.1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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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에 먹는 부럼

설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대보름도 지났다. 이 칼럼의 주제가 ‘자연산책’이지만 사라져 가는 우리 세시풍속을 기억하고자 정월대보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정월대보름(음력 1월 15일)은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로, 우리나라에서 설날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명절 중 하나였다. 한자로 ‘상원(上元)’이라고도 한다. 상원은 도교에서 유래된 단어로 ‘천관의 복이 내리는 날’이라는 의미가 있다. 1월 보름의 상원 외에도 7월 보름 중원(中元, 백중날)과 10월 보름 하원(下元) 등 보름달과 관련한 명절이 있다. 설날과 더불어 중요한 명절인 추석도 음력 8월 15일로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그만큼 우리 조상들은 보름달을 중요하게 여겼던 듯하다.

그중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보름달이 뜨는 날이니 어찌 중요하지 않았으랴!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한 해 농사의 풍·흉년을 점치기도 했고, 한 해 운수를 점치기도 했다. 요즘도 우리는 대보름에 오곡밥을 먹고, 호두 땅콩 등 부럼을 까먹고, 어른들은 귀밝이술을 마시기도 하며 대보름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필자가 어릴 적엔 대보름은 동네 아이들의 잔칫날이었다. 요즘엔 ‘발렌타인데이’니 ‘할로윈데이’니 하는 서양에서 넘어온 명절을 상업적으로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됐지만, 필자가 초둥학생(엄밀히 따지면 국민학생) 시절인 1980년대에는 대보름이 일년 중 가장 기다려지는 명절이었다. 평소에는 남자 여자 아이들이 편을 나눠 놀면서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 고무줄 끊기 바빴고,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리며 거리를 뒀지만 정월대보름이 되면 상황은 달라졌다.

연날리기 모습

대보름이 뜨기 전인 음력 1월 14일은 전야제처럼 모든 동네 아이들이 모여 남녀 구분 없이 몇 명씩 편을 만든다. 그리고 바가지를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밥을 훔친다. 공식적으로 도둑질이 허용된 날, 밥 서리를 하러 다니는 것이다. 밥을 훔칠 때는 꼭 성이 다른 세 집의 밥을 훔친다. 그래야 운이 좋다고 한다. 아이들은 편을 나누고 머리를 써서 공격할 집을 결정해 전진한다. 시골마을이라 냉장고가 없는 집들이 많았고, 이름만 대문인 사립문이나 그조차도 없는 집들이 허다했으므로 남의 집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식은 죽 먹기였다.

맛있게 지어놓은 오곡밥을 가마솥에 고이 모셔둔 집, 토종닭을 삶아 냄비에 담아 놓은 집, 나물을 맛있게 무쳐 그릇에 예쁘게 담아둔 집들은 아이들의 보물창고였다. 아이들은 준비한 바가지에 갖가지 음식을 뷔페처럼 골고루 담아 그들만의 아지트로 모여든다. 비밀장소라고 해봐야 누구네 집 비닐하우스나 부잣집 사랑방이었다. 아지트에 모여 서로 훔쳐 온 음식 자랑을 하며 으스대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음식을 나눠 먹는다. 각종 나물이 섞여 있으니 메뉴는 자연스럽게 비빔밥이다. 거나하게 저녁을 먹고 나서 분유통에 구멍을 뚫어 만든 쥐불놀이라고 하는 ‘개부리깡통’을 돌린다. 위험천만한 ‘불놀이’이지만 그만큼 재미있는 놀이도 없다. 그렇게 이것저것 놀거리를 찾아 밤을 지새운다. 다음 날이 되면 엄마들은 없어진 음식들에 대해 서로 푸념을 떨 듯이 이야기꽃을 피운다.

어른들은 윷놀이를 하고 달집태우기를 하며 한 해 동안의 무사안녕을 빈다. 또 아이들은 겨울 동안 날렸던 연줄을 끊는다. 정월 보름 이후 연을 날리는 건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면서. 정월대보름이 지나면 이제 농사일을 준비해야 하니 그만 놀고 아이들도 바쁜 일손을 거들라는 속뜻이 숨어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정월대보름은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즐겁고 활기찬 명절이었다.

가을에 동네 어귀 커다란 호두나무에는 동네 아이들이 매일매일 모여들었다. 떨어진 호두를 주워다 시냇가에서 껍질을 벗겨낸다. 나무에서 떨어진 잘 익은 호두는 아이들이 벗기기도 쉽다. 손에는 호두껍질 물이 들어서 지워지질 않는다. 꼭 아프리카인 손 같다면서 서로 놀려대며 웃는다. 대량의 호두를 수확할 때는 호두를 땅속에 묻어 썩힌 후에 잘 씻으면 쉽게 껍질을 벗겨낼 수 있다. 밤도 마찬가지로 껍질째로 흙 속에 파묻어 썩힌다. 집에 밤나무가 없는 친구들은 새벽이 되면 졸린 눈을 비비며 산으로 향한다. 조금만 늦으면 더 부지런한 친구가 떨어진 밤을 다 주워가서 맛있는 겨울 간식거리를 모을 수 없다. 이렇게 정성과 노력을 들여 준비해뒀던 호두와 밤, 땅콩 등을 정월대보름에 부럼으로 먹는다. 허투루 된 게 없다.

어른들의 노고와 아이들의 소박한 노력이 담긴 정월대보름을 통해 마을공동체는 한해 기원을 빌며 서로 화합의 의지를 다진다. 그렇게 한해 한해가 모여 나의 역사가 되고, 마을의, 우리 민족의 역사가 됐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겐 어떤 모습의 정월대보름이 새겨졌을까? 나처럼 즐거운 기억들로 가득 찼길 바란다.

송미란(생태환경교육협동조합 숲과 들 생태활동가)  webmaster@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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