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악 인생 70년, 용인 백암농악…’ 기사를 보고

박상옥

필자가 아는 백암농악은 남사당의 남운용(남형우) 선생이 청룡사를 건립할 때, 안성에 자리를 잡고 내 친구 이종궁(스님)의 부친 이필재(안성에서 절 운영) 선생과 김종운 선생(나의 외숙) 등이 함께 동참했다. 이필재 선생이 오방을 떠나서 서울로 상경하자 김익수(외가로 박상옥의 형뻘) 선생이 상쇠를 잡았으며, 그 영향을 받아 당시 백암에는 농악 팀이 많이 있었지만 3개 농악팀이 유명했다. 백암리 팀에는 김만성 선생이 상쇠 잡이로 날렸고, 벌말 팀으로는 유명수 선생이, 장평리 팀으로는 지금의 안성농악의 창시자 김기복 선생이 이름을 날렸다. 김기복 선생이 다리 건너 이사했는데 행정구역으로 안성 땅이 되다보니 안성농악의 상쇠가 된 것이다. 

김기복 선생이 장평리 팀을 이끌고 나올 때 차용성 선생은 상모를 돌리며 참가했고, 그 뒤로는 장구잡이도 했지만 상쇠로 꽹과리 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백암의 모든 팀이 와해됐으나 벌말 팀이던 유명수 선생이 백암리로 이사 와서 백암농악을 다시 만들어 이끌어 갔으며, 본인에게도 배우기를 권하기도 했다.

차용성 선생은 상모를 돌리기도 했고, 장구잡이도 했지만 그 당시 상쇠잡이를 한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차용성 선생은 김기복 선생이 이끌던 장평리 팀의 팀원이었지, 백암농악 김만성 선생이 이끌던 백암농악대의 일원은 아니었다.

또한 백암우시장(소시장)에서 농악을 놀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 당시 우시장에서는 농악놀이를 하지 못했다. 우시장에는 소를 매어놓는 큰 말뚝이 박혀있는데, 우전에서 농악을 놀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당시 음력 7월 15일이면 백중장이 서고 싸전마당에서는 농악대회가 열려왔던 것이다.

그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벌말(평촌) 출신인 유명수 선생을 비롯해 곽한명 선생 등이 백암농악을 되살렸고, 유명수 선생을 따라다녔던 지금의 배소희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자 아직도 노력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백암농악도 이런 저런 내분으로 전승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백암농악대는 백암에 있어야 그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지 백암을 떠나서 백암농악이라는 깃대를 세운다면 그 과정상 아무리 잘 되었다하더라고 근본을 저버린 것이기에 있을 수 없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이천에서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전승 발전시키고 있는 거북이놀이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백암면 가창리에서 15세부터 8월 추석 때 거북놀이를 했다. 하지만 고개 너머 이천 호법면으로 넘어가서는 급기야 이천이 보유하고 있는 경기문화재라는 것만 봐도 발생하고 번져나가던 것도 바탕을 떠나서는 백암농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며 현거주지 명칭으로 활동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백암농악으로 명성을 떨치던 김만성 선생도 서울로 이사해 미아리에서 농악놀이를 했지만 백암농악 즉, 백암농악대란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본다. 명칭만 백암농악이라면 서울에 가서는 못 만들 것이 없을 테지만 작고하신 김만성 선생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필자는 백암농요를 전승시킨 사람이지만 서울에 살면서 백암농요를 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기에 현지인들에게 전승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필자는 어릴 때부터 해오던 백암농요 전승을 위해 2002년 8월 20일에 현지인들을 주축으로 백암농요보존회를 결성했으며, 2004년 10월 12일에는 국립국악원에서 발표회도 가졌다. 그 당시 용인시민신문 기자와 현 용인문화원 사무국장도 와서 관람했고, 2011년 처음 가창리에서 현지인들이 재현함으로서 그 맥을 이어가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2018년 처인성문화제 민속놀이경연대회 대상 수상에 이어 2019년 경기도 민속문화제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당당하게 백암농요로 출전해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제는 전국으로 나서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고 있는 것만 봐도 백암 본 바닥에 상주하는 농악으로서 백암농요가 반드시 향토문재로 지정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용인문화원의 뒷받침도 있지만 백암농요보존회 회원들의 피땀어린 노력과 희생 없이는 백암농요는 결코 발전할 수 없을뿐더러, 백암농요 그 자체는 백암에 있을 때에만 백암농요인 것이다. 따라서 백암농악도 역시 백암에 있을 때 백암농악인 것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짧지만 현재의 백암농악이 가는 길을 보면서 아쉬움이 너무 많아 몇 자 감회를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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