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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 이동훈(서울새로운내과 원장)
  • 승인 2019.11.2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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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점으로 묘사한 페스트균(시바사부로)

원나라 말기인 1308년 중국 남부지역에 역병이 시작됐다. 2만7000명이 사망한 전염병은 중국 전역을 휩쓸면서 60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쿠빌라이의 손자 테무르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1307년 사망했는데, 치열한 왕권 다툼이 벌어지면서 10여 년 동안 7명의 황제가 바뀌는 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중앙정부의 혼란 속에 발생한 재난은 원나라를 송두리째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14세기 중국 인구가 1억200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한 것이다. 적은 수의 몽고족으로 많은 중국인들을 통치하기 어려웠던 원나라의 행정조직은 완전 마비상태에 빠졌으며, 중국 남부에서는 도적과 반란이 이어졌다. 특히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었던 홍건적은 큰 세력을 만들었는데, 홍건적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주원장은 몽고족을 북쪽으로 밀어내고 명나라를 건국하는데 성공했다.

중국을 초토화시킨 전염병은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고,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역은 시체로 뒤덮였다. 작은 마을은 사라졌고 문명은 파괴됐다. 많은 사람들은 전염병을 피해 달아났고 일부는 더 서쪽으로 도망갔다. 1347년 10월 이탈리아 남쪽 시칠리아의 항구도시 메시나에 상선 12척이 도착했다. 물건을 찾기 위해 배에 올라갔던 사람들은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됐다. 대부분의 선원이 사망한 상태였고, 남은 사람들은 검정색 종기와 피고름이 온몸에 덮여 있었던 것이다. 끔찍한 유령선 같은 상황이었다. 시칠리아 당국은 즉시 해당 선박들을 추방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사타구니와 겨드랑이가 붓기 시작했고, 부어오른 덩어리에서 피와 고름이 나오면서 고열과 설사, 구토를 하면서 죽어가기 시작했다. 

끔직한 전염병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환자를 돌보던 의사는 물론 시신을 매장하러 갔던 사람들조차 하나둘 사망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전염병에는 남녀노소,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파리나 런던 등의 대도시는 치명적이었다. 단 5년 사이에 유럽 인구의 30%, 약 1억 명 이상이 사망했다. 유럽 역시 경제가 파괴됐고 지방의 작은 영주들은 몰락했다. 
 

작은 막대기 모양의 페스트균(예르생)

서구에서 이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자세한 편인데, 보카치오가 쓴 소설 데카메론에는 남녀 모두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에 종양이 발생하고 커지면서 몸에 다른 곳으로 퍼지면서 검은 반점이 나타나면서 죽음으로 향해간다고 묘사돼 있다. 특히 로마교황청의 콜로니 주교는 호흡기 증상이 나타나는 형태와 겨드랑이 등에 덩어리가 만져지는 형태가 있다는 사실을 남겨 놓았다.

전 세계에 재난을 뿌렸던 전염병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수백 년이 지난 1894년이었다.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에 근무하던 예르생은 중국에서 발생한 호흡기 전염병을 조사하기 위해 홍콩으로 파견됐다. 일본 내과의사 기타자토 시바사부로 역시 홍콩에 파견돼 연구하고 있었는데, 환자의 검체를 현미경으로 관찰해 어떤 물질을 발견했다. 시바사부로는 이 물질이 병원균이라고 생각하고 발표했다. 며칠 뒤 예르생 역시 비슷한 물질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발견한 것은 죽음의 검은 반점을 만들어내는 흑사병의 원인균인 ‘페스트’였다. 그러나 서둘렀던 시바사부로의 그림은 모호했다. 반면 예르생의 그림은 정확하게 묘사돼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그람 염색이었다. 예르생은 그람 방법에 의해 세균이 염색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시바사부로는 염색이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후 그람 방법에 의해 염색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페스트균의 발견은 예르생의 것이 됐다. 예르생은 파스퇴르를 기려서 파스텔라 페스트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1967년 예르생의 공적을 인정해서 예르시니아 페스트로 변경됐다. 

페스트균이 흑사병의 원인으로 밝혀지면서 전염 경로도 알 수 있게 됐는데, 쥐나 고양이가 아닌 쥐벼룩이었다. 쥐벼룩의 위장관 속에 있던 균이 사람을 물어서 전파된 것이었다. 1910년대 만주에서 페스트균이 유행했다. 수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조선을 식민지배하고 있던 일본은 경찰력을 동원한 강제 검역에 나섰다. 쥐를 통해 전파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쥐잡기 운동에 나섰는데 환자들이 계속 발생했다. 쥐뿐 아니라 다른 전파 방식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기침을 할 때 배출되는 객담이 원인이었다. 만주의 흑사병은 국내에도 유입돼 1921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함경도 청진으로 입항한 선박에서 환자가 발생해 가족 5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흑사병도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조절 가능한 질병이 됐다. 최근 중국에서 흑사병이 발생해 한국의 보건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동물을 숙주로 하는 질병은 완벽한 근절은 어렵다. 페스트균에 의한 감염질환은 현재도 전 세계에 매년 2~3천명씩 발생하며, 이 중 500여 명이 사망하는 위험한 질병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시대인 현대에 다양한 감염질환이 국내에 유입될 수 있다. 2015년 메르스 사태로 대한민국은 큰 피해를 본 적이 있다. 해외여행 후 발열 등의 증상이 나타날 때 여행 국가의 전염병 상황을 파악해 의료기관을 방문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위험한 전염 질환도 대비를 철저히 하면 방지할 수 있다.

이동훈(서울새로운내과 원장)  webmaster@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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