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면에서 나고 자란 이재호 사장은 10대부터 이발업에 종사해 지금까지 반백년이 넘도록 유지하고 있다.

청색·홍색·백색의 둥근 기둥, 가위와 이발기(일명 바리캉을 불리는 클리퍼), 비누와 신문지 그리고 하얀 가운. 바로 이발소를 상징하는 도구들이다. 10~20대에겐 ‘세빌리아의 이발사’라는 예능프로그램으로 익숙하겠지만, 미용실이 과거 미장원으로 흔히 불리던 시절, 이발소는 중년 이상의 남성들에게 추억의 장소다. 지금이야 미용실을 이용하고 있지만, 기자 역시 10대 때에는 이발소에서 주로 머리를 깎았다. 어려서 이발사가 가죽에 무딘 면도날을 갈 때면 그저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7일, 다소 낡은 삼색의 이발소 표시등이 그날따라 반갑기만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인자한 얼굴을 한 이발사가 한창 가위로 손님 머리를 깎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의자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버스가 왔나 보다”며 문을 나섰다. 아마 버스가 오기 전까지 시원한 바람을 쐬며 쉬고 있었던 모양이다. 손님 면도를 하면서도 익숙한 듯 “그려, 잘 가게” 인사를 한다.

45년째 처인구 백암면 주민들의 머리를 다듬고 있는 이발사, ‘대동이발관’을 운영하고 있는 이재호(70) 사장이다. 백암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라 그런지 이 사장이 운영하는 대동이발관은 이발소 이상의 공간이다. 한여름 버스를 기다리는 노인들의 쉼터이자 동네 주민들 만남의 장소인 것이다. 늘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대동이발관에 가면 이러저러한 마을 소식도 쉽게 전해 듣는다. 이렇게 45년을 이어왔으니 적어도 50대 이상 주민들 중 상당수는 이재호 사장의 손길을 거치지 않았을까.
 

56년째 이발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 사장이 이발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나이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4살이었다. 

“배고프던 시절이었죠. 농사 지을 땅도 없을 만큼 가난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장간에 들어갔지만, 힘 없는 14살짜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발소를 찾았죠. 14살부터 이발소에 취직해 9년 간 일을 배웠죠. 군 제대 후 대동이발관으로 이발소를 시작했으니까 올해로 44년 됐네요.”

반세기 가까이 대동이발관을 운영했으니 추억과 사연도 많았을 터. 대동이발관 문을 연 이후 숨을 거두기까지 40년 가까이 이 사장에게 머리와 수염을 깎은 한 노인과 인연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일이 있어 문을 닫아도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어코 나한테 이발을 한 어르신이 계셨어요. 군 제대 후 대동이발관을 시작할 무렵부터니 40년은 됐을 거예요. 어디 좀 갔다 왔더니 돌아가신 거에요. 돌아온 날이 발인이었더라고. 바로 택시를 타고 장지를 갔다 온 그 어른이 생각나네요.”

대동이발관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20~30년 이상 된 단골들이다. 40년 단골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곳을 찾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말 동무도 돼주고 쉼터 역할도 하는 곳이지만 무엇보다 손님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이재호 사장 때문이다. 이발부터 면도, 드라이까지 걸리는 시간만 45분가량. 일반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이들이라면 45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알 수 있을 터.

이재호 사장이 운영하는 대동이발관은 백암면 주민들의 쉼터와 같은 곳이기도 하다.

한때 직원 4명을 둘 정도로 대동이발관은 잘 나가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혼자서 하루에 손님 10명을 받는 게 고작이지만, 이재호 사장은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발사로 살아온 56년이면 강산이 5번은 변하고도 남을 긴 시간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건지 모르겠다. 

이발기에 머리가 뜯겨나가는 고통마저 추억이라 여기고 사는 백암 주민들에게 2019년 여름은 어떻게 기억될까. 30년 넘은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과 낡은 의자와 화장대, 청색·홍색·백색의 둥근 이발소 표시등이 켜진 대동이발관이 그 자리에 10년이고 계속 남아 있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비단 기자 혼자만의 생각일까.
<영상보기 https://youtu.be/UZttsxL1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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