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군정서(부독판 여준) 중대장으로 청산리·봉오동 전투를 승전으로 이끈 오광선은 1933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요청에 따라 산해관을 넘어 낙양의 군관학교 교관으로 초빙됐다. 이어 밀명을 받아 일본군 점령 하의 북경으로 밀파돼 금은방을 차리며 비밀공작에 종사했다. 하지만 곧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고, 1937년 11월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오광선의 체포 소식을 들은 남경의 임시정부 지도부와 가족들은 그가 처형당했을 것으로 여겼다. 임정 요인들은 부인 정정산과 희영(1925년생)·희옥(1927년생) 자매, 그리고 유복자인 영걸(1936년생)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의병장 출신인 부친 오인수 옹도 사망해 가족의 고통이 너무 컸던 것이다.

오광선 인터뷰(신동아)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져 임시정부 요인들과 오광선 가족은 모두 남경에서 기강으로, 다시 중경으로 기나긴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중경의 토교라는 작은 마을에서 모인 임정 식구들은 일본군 공습을 피해 살면서 텃밭을 일구며 요인들 뒷바라지를 했다. 정정산 여사와 어린 3남매는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이시영 선생 등의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어려움을 이겨낸 오광선 가족은 직접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열기를 보여줬다. 정정산 여사는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이 결성되자, 그 맹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44년 한국독립당 당원에 가입해 임정 활동에 참여했다.

두 딸인 희영·희옥 자매 역시 1939년 2월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해 선전활동은 물론, 광복군에 입대해 초모공작 등에 활약했다. 특히 맏딸 희영은 1944년 김구 주석의 비서와 경호업무를 맡고 있던 신송식(1914~1973)과 혼인해 ‘부부 광복군’의 모범을 보였다. 장남 오영걸은 이날 결혼식에 김구 주석이 주례를 서 주었다고 기억했다. 평남 안주군 출신인 신송식은 광동정치군사학교와 중앙육군군관학교 제4분교를 졸업한 인재였다. 그는 1941년 중국군을 나와 한국광복군 서안 전방사령부 참령참모에 임명돼 오희영과 함께 주석 비서실에 근무하다 결혼하고 광복을 맞았다. 1946년 11월 김구 주석으로부터 주화대표단 전원위원으로 임명된 신송식은 중국에 남아있던 동포들의 귀국을 돕고 1947년에야 귀국했다.

신송식 지사는 오희영 지사 남편으로 부부 광복단이었다.
신송식 임명장

 일제의 패망 소식을 만주 흥안령 지역에서 듣게 된 오광선은 상해로 달려가 옛 상관인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장군을 만났다. 이 장군은 그에게 광복군 소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국내 지대장으로 임명했다. 가족은 상해에서 감격의 상봉을 한 후 귀국했다. 그러나 미·소 냉전과 좌우대립이 첨예화된 상황에서 일가는 해방의 기쁨을 누릴 여유가 없었다.

오광선 장군은 독립된 나라의 군대를 만들기 위해 광복군 국내 지구사령부를 설치했고, 미군정의 압박을 버텨가며 광복청년회를 조직해 중앙집행위원장과 훈련원장을 맡았으며, 사위 신송식에게 전위총대장을 맡겼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만주군관학교 출신 친일파 군인들을 등용하는 한편, 오광선·이청천 등 독립군 출신들을 중용하지 않았다. 오광선은 1948년 12월 육군사관학교 특별훈련반에 입대해 대령으로 임관된 후, 국방부 국회연락장교 등을 역임하다가 한국전쟁 발발 때 단신으로 월남해 국군에 합류했다. 전쟁 기간에도 육군 제1보충대대장, 대전지구 위수사령관 등 후방을 전전하다가 1956년 7월 준장으로 예편했다. 역전의 독립군 용사는 1967년 73세로 서울 이문동 단칸셋방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정정산 여사는 용인 처인구 원삼면 죽릉리에서 노후를 보내다가 큰딸 희영을 1969년에 먼저 떠나 보냈다. 이어 1973년 사위의 임종을 지켜봐야 했고, 1992년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여사는 둘째 딸 희옥이 1990년 서훈을 받은 지 5년 만에 가장 늦게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마지막 남은 3대째 독립운동가 오희옥 여사는 현재 1년 넘게 보훈병원에서 투병 중이다. 할아버지 오인수로부터 오광선·정정산, 오희영·신송식, 오희옥의 40년 독립운동에서 대한민국은 너무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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