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류완희는 1901년 용인 내사면(현 처인구 양지면) 송문리 429-1번지에서 태어났다. 양지공립보통학교를 4회로 졸업한 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이어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행정법과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많은 시간 문학도서 탐독으로 보냈다고 한다.

1923년 3월 20일 본과를 1회로 졸업한 류완희는 법률가가 되라는 주위의 권고를 뿌리치고 경성일보의 편집부 겸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다. 이후 그는 동아일보와 시대일보, 중외일보 등에서 당대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파헤치는 기사를 쓰는 한편, 시 창작 활동에 나섰다. 그는 심훈·김기진·염상섭 등 동료 기자들과 교류하며 애국계몽에 관한 시와 수필을 발표했다. 민족정신과 사회정의에 남다른 열정을 가졌던 기자 류완희는 평기자 중심의 민주언론단체인 철필구락부를 조직해 기자들의 급료 인상 투쟁을 벌이다가 심훈 등과 함께 퇴사당하고 말았다.

송전초등학교 교가

그는 곧 홍명희가 사장으로 있는 시대일보사로 옮겨 당시 분출하고 있던 소작농민의 항일 투쟁현장을 취재해 보도했다. 대표적인 기사로 1925년 호남 전역에서 벌어진 소작쟁의로 인한 ‘민중운동사 사건공판’이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악덕 대지주들의 농지 수탈 현실을 폭로하는 한편, 소작농들의 저항운동 과정을 기사화했다. 류완희는 8월 <거지>라는 시를 《시대일보》에 발표해 문단에 등장했다. 이 무렵 신념을 향해 천리마처럼 내달리자는 의미로 ‘붉은 망아리’란 뜻의 필명 ‘적구’를 쓰기 시작했다.

용인중학교 교가

적구라는 필명으로 그는 『개벽』지에 <여직공> <희생자> <아오의 무덤에> <향락시장> 등을 실어 식민지 민중들의 참담한 생활상과 울분을 생생히 표현했다. 나아가 『문예운동』지에 평론을 게재하는 한편, 소설 <영오의 사>를 게재했다. 일제는 그의 항일작품에 대해 명예훼손죄로 고소해 금고 3개월의 체형을 받게 했다. 그는 다시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사장인 이상재와 안창호 등에게 교육철학을 배웠다. 이어 그는 조선문학원에서 강의하면서 <나의 요구> <나의 행진곡> <가두의 선언> <민중의 행렬> <오즉 전진하라!> <어둠에 흘으는 소리> 등의 시를 발표했다. 이후 그는 여운형 사장의 조선중앙일보사 편집 간부로 일하다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 선수의 유명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기자생활을 그만두게 됐다. 류완희는 문단에서 자취를 감추다가 독립자금을 조달하던 비밀기관에서 일하다 해방을 맞았다.

3.1절 축시

해방이 되자 사회주의자들이 카프를 재결성하며 정국을 주도했지만, 류완희는 옛 분노의 투사가 아닌 고향 용인에서 지역발전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그는 1948년 11월 설립인가를 받은 용인여자중학교 초대 교장을 맡은데 이어, 이듬해 용인중학교 교감에 취임해 중·고교의 교가를 작사했다. 한국전쟁 와중에도 그는 산속에 은신해 공산군의 추적을 피했다. 그는 1955년 이동면 송전중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해 태성중·고등학교 등의 교가를 작사했다. 잠시 옛 동료들의 추천에 따라 서울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3·1절 행사와 8·15 광복절 등에 기념시를 발표했다. 뜨거운 민족애와 반공의식,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류완희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권에도 강력한 필봉으로 비판하며 애국정신을 심어주었다. 반독재와 정론직필 활동에 분주했던 류완희는 1960년 11월 쇠약해진 심신을 치료하기 위해 논설위원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용인 송문리로 낙향했다. 그는 “항시 올바른 몸가짐으로 정의롭고 의롭게 행동해야 하며 불우한 이웃을 돌볼 줄 알고 후학들을 선도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1964년 2월 17일 간암으로 별세했다. 묘소는 처인구 양지면 송문리 반정마을 뒷산에 있다.

아직 그의 묘소뿐 아니라 온 정열을 쏟았던 송전·용천초등학교와 용인·태성중, 태성·용인바이오고등학교 등에는 시비가 세워져 있지 않다. 일제와 공산주의,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민족의 자유와 용인의 희망을 노래했던 이육사와 같은 용인 시인을 후학들이 기억하고 배웠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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