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200여 종합대학이 있고, 용인시에만 9개 대학이 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가 설립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독립운동사를 정규강좌로 가르치는 대학은 용인의 단국대학이 유일하다. 단국대학을 설립한 범정 장형 선생은 1889년 1월 18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9살까지 한학을 공부한 그는 1908년 서울로 올라와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했다. 학창시절 그는 설립자 이용익을 비롯해 안창호와 손병희 선생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1909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단 한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장형도 학업을 중단하고 비밀결사인 신민회 회원으로 들어가 독립자금 모집에 전념했다.

1911년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 회원을 검거해 고향 인사들이 많은 피해를 입자, 그는 그해 2월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중국 남부부터 만주 일대까지 안 가본 데 없이 돌아다닌 ‘남선북마’ 독립군이었다. 1914년 평양헌병대장이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를 거쳐 조선총독 앞으로 보고된 자료에 의하면, 장형(본명 장세담)은 항상 서울과 안동현 단동·심양 등지를 왕복하면서 젊은 동지들을 규합해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국외로 망명시켜 신흥무관학교로 입교시키는 역할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김구 선생과 장형(오른쪽)

장형의 독립활동은 무엇보다 군자금 모집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손병희 선생의 유훈에 따라 군자금 조달의 중책을 맡았다. 1919년 무렵 국내로 들어와 자금을 모집한 후 이를 서로군정서를 비롯해 정의부에서 재무부장을 맡은 오동진, 대한독립단의 전덕원 등 만주 독립군들에게 자금을 전달했다. 또한 용인 출신 대한독립군단 중대장 오광선과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총장 이시영 등에게 군자금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형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우선 1921년 8월 국내에서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조직해 총재로 취임한 후, 애국계몽을 선전하기 위해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다.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여운홍 등이 참여한 이 강연단은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애국강연을 한 후, 감동받은 청중들로부터 의연금 명목의 자발적 성금을 받은 것이다.

일본헌병대 보고서(1914년)

장형은 한의침구술을 교습받아 침술사로 위장해 국내·외를 오갔다. 그의 한의사 활동은 1916년 무렵부터 약 20년 동안 이어졌는데, 애국지사들을 접촉하는 수단이자 군자금을 모집하는 방편이 됐다. 이에 일제 경찰은 1930년 9월과 1938년 두 차례에 걸쳐 그를 유사의료행위를 빙자한 사기 혐의로 구속시켜 버렸다. 이에 강원도 철원의 거부인 고중권과 화성의 박기홍 등이 나서 변호인단의 증인으로 나서 풀려날 수 있었다. 특히 그와 혈연동지를 맺은 박기홍은 기꺼이 자금창구 역할을 맡았으며 전 재산을 애국동량을 키우는 육영사업에 사용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해방 직전 숨을 거뒀다. 그의 막대한 재산은 후일 부인 조희재 여사를 통해 단국대학의 설립자산으로 활용됐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장형은 1932년경 반석현으로 이주해 1945년 11월까지 정미소를 운영하며 농업에 종사했다. 이 곳에서 한인들의 긴요한 식량을 생산하는 정미소를 운영하며 군자금을 조달했는데, 일본군 수비대에게 방화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반석현에서 8·15해방을 맞아 서울에 귀환한 장형은 김구 임정 주석과 신익희 외무부장이 추진 중인 국민대학설립기성회에 참여하고, 군국실천양성소를 조직했다. 하지만 신익희 학장이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이승만계에 합류하자, 장형은 임정의 정신을 계승할 새로운 대학 설립을 결심했다. 그는 민족사학자인 장도빈과 안재홍·안호상 등과 의논해 단군의 건국사상과 애국정신을 따서 학교 이름을 단국으로 정하고, 1947년 11월 3일 최초의 사립대학 설립인가를 받게 됐다. 장형은 교수들에게 독립운동사를 교육시킬 것을 당부해 오늘로 이어지게 했다. 이후 김구선생기념사업회를 이끌다가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 훈장을 수여 받은 후 이듬해 12월 눈을 감았다. 그의 유훈대로 단군성조의 홍익인간 사상과 자주독립정신이 용인에 깊이 뿌리내려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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