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문의숙 기록(1916)

호국·보훈의 달 6월에 용인시 문화예술원에서는 용인시민 소장 문화재전과 독립운동 자료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한응·민영환·오광선 등 용인에서 배출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의 손때가 묻은 귀중한 유품과 생생한 역사자료를 만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다. 이 중 용인 태생의 민족시인이지만, 현재 화성시 동탄면에 자리한 문학관에서 보관 중인 홍사용의 유품도 만날 수 있다. 암울한 일제 침략 시기 눈물과 순우리말로 민족적 울분을 쏟아내며 저항한 시인 노작 홍사용이 태어난 곳은 오늘날 삼성반도체 공장이 자리한 용인 기흥구 농서동 151번지, 이른바 용수골이다.

홍사용은 1900년 5월 대한제국의 통정대부 육군 헌병 부위로 근무하던 아버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서울 재동으로 근무처를 옮김에 따라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자, 아버지와 함께 화성 석우리로 낙향했다. 이후 1916년 홀로 서울로 상경한 홍사용은 휘문의숙에 입학했고, 월탄 박종화와 정백 등과 함께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홍사용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도중 일제 경찰에 체포됐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6월에 풀려났다.

 

백조창간호

그의 민족정신은 이후 더욱 빛나 1920년 서울로 돌아와 『문우』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여기에 시를 발표했다. 문학청년 홍사용은 동인지 󰡔백조󰡕를 통해 피어났으니 나도향·현진건·이상화 등과 함께 3호까지 발간했다. 1923년 9월에 발간된 󰡔백조󰡕 3호에 홍사용은 유명한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발표한다. 잡지는 암울한 식민지 현실을 절망과 퇴락으로 표현했지만,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절실함도 밝히고 있다. 이어 토월회에 가입해 서양극을 번역하는 한편, 직접 <회색의 꿈>이란 연극의 연출가로 활동했다. 나아가 1924년 자작 연극인 <산유화>를 상연하는 한편, 이듬해 <무정>과 <추풍감별곡>을 각색해 상연했다. 또 1927년에는 박진·이소연 등과 극단 산유화회를 조직해 연극 운동을 벌이게 된다. 창립공연으로 1927년 5월 조선극장에서 <향토심>과 <소낙비>를 상연했다.

홍사용은 1928년 5월 평론 <조선은 메나리나라>를 잡지 『별건곤』에 발표한다. 이 평론에서 그는 민요를 빌어 한민족의 넋과 정체성에 대한 강한 신념을 피력했다. 그의 애정은 후일 <붉은 시름>과 <각시풀>(1938) 등의 연작시로 나타난다. 하지만 잡지 발간과 연극 활동에 대한 자금 압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홍사용은 병을 얻어 각혈을 하기 시작했다.

 

토월회공연사진

그러던 중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와 조선총독부가 1939년 홍사용에게 희곡 <김옥균전>을 쓰도록 강요했다. 홍사용은 이를 거부하고, 절필을 선언해 버렸다. 이후 그는 작품을 쓰지 않은 채, 전국의 사찰을 순례하면서 불경 연구에 힘썼다. 드디어 고대하던 해방이 되자 노작은 가슴에 품었던 웅지를 펼치고자 근국청년단을 조직해 중국에서 귀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봉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오랜 방랑과 투병생활로 폐 질환을 얻어 병석에 눕게 된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에게 임정 행사와 건국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1947년 1월 4일 홍사용은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큰 아들 집에서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석우리 묵실 불당골에 묻혔다. 현재 화성시 석우동에는 그의 호를 따 만든 노작공원이 있고, 그의 작품세계를 소개하고 유물을 전시하는 ‘노작홍사용문학관’이 2010년 개관해 지역주민들의 쉼터인 동시에 문학 나눔터가 되고 있다. 100만 도시 용인에서도 얼른 멋진 기념관이나 문학관, 상설 전시관 등이 많이 세워져 용인의 독립지사들과 민족 지성들의 고귀한 유품과 문화재를 자주 만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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