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상흔 남긴 용인…좌·우익 대립 생채기도
6월이 되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현충시설을 찾는 유족과 학생들의 발걸음이 늘어난다. 용인에는 나라를 되찾거나 지키기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와 참전용사들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현충시설’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시설이 용인중앙공원에 있는 ‘현충탑’과 터키군의 한국전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터키군 참전기념비’이다.

용인에 현충시설이 곳곳에 만들어진 것은 6·25전쟁 당시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과 남북한이 격렬한 전투를 벌인 현장이 용인 곳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3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룬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를 제외하고, 6·25한국전쟁과 관련한 현충시설과 많은 희생자를 낸 대표적인 전투지와 피해를 중심으로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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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현충탑

현충일인 6월 6일이면 용인시 주관으로 현충일 추념식 행사가 처인구 김량장동 현충탑에서 열린다. 현충탑에는 1975년 6월 6일 이일영 작가에 의해 건립된 충혼탑(높이 15m)과 좌우에 위패가 있다. 왼쪽 위패 벽면에는 ‘억만겁 이어나갈 억천만 생이여 여기 우리 군민이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우니 우러러보고 또 우러러보아 길이 이 나라 지키소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1990년 6월 6일 당시 용인군은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그 뜻을 후세들이 영원히 기억하고 계승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희생자들의 당시 계급과 이름을 지역별로 새긴 호국영령 기념비를 충혼탑 좌·우 측에 설치했다.

터키군 참전기념비

마성IC에서 서울 방향으로 진출하다 우회전 하면 마성IC 회차로에 터키군 참전기념비가 있다. 한국에 파병돼 1950년 10월 17일부터 휴전하기까지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다. 국방부는 터키군의 공적을 기리고 산화한 터키군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74년 9월 기념비를 건립했다. 공원에 들어서면 가운데 기념탑이 있고 입구 왼쪽에 터키군의 한국전 참전 부대와 주요 전적을 새긴 동판이 설치돼 있다.

터키군은 용인과 인연이 깊다. 1950년 10월 17일 참전한 터키군은 1951년 1월 25일~27일 김량장리 185고지와 156고지에서 북한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는데, 당시 터키군의 백병전이 UPI기자에 의해 생생한 모습으로 전세계에 보도됐다. 이를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은 부대표창을 수여했다. 터키군은 휴전 이후 유엔군 후방지역 방엄 임무를 하다 한국 땅에 발을 내디딘 지 16년 만인 1966년 7월 10일 귀국했다. 총 10차례에 걸쳐 터키 여단이 파병됐으며 한국전쟁 당시 터키군 전사자와 부상자는 3064명에 달한다.

육군 참점을 의미하는 동상 아래 비문에 ‘유엔군의 기치를 들고 터어키 보병여단은 한국의 자유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침략자와 싸웠다. 여기 그들의 전사상자 3064명의 고귀한 피의 값은 헛되지 않으리라’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호국유공자 공적비

처인구 김량장동 용인중앙공원 옻샘약수터 좌측에 호국유공자 공적비가 있다. 무공수훈자회, 6·25참전유공자회를 비롯한 4개 보훈단체 요구를 용인시가 받아들여 건립했다. 서정석 전 시장 재임 시절인 2009년 7월 1일 건립됐는데, 6·25참전유공자, 무공수훈자, 베트남참전유공자, 6·25베트남참전 전상자 공적비 4기, 참전자와 전상자 군번과 성명을 새긴 명부석,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자유수호희생자위렵탑

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은 비단 군인만이 아니다. 한국전쟁은 학생 신분이었던 학도병은 물론,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된 참혹함 그 자체였다.

특히 민간인 중에는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가 있었지만, 좌·우익 갈등에 의한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그 생채기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자유수호희생자위렵탑으로 호칭이 바뀐 ‘반공희생자위령탑’이다. 6·25전쟁 당시 반공인사 187명이 집단학살돼 매몰한 곳에 묘와 탑을 설치하고 해마다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경기일보 사장을 지낸 신창기 씨가 방치돼 있던 민간인 학살 현장에 사비를 들여 봉분과 비석을 세우고, 1979년 처음으로 위령제를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한국자유총연맹의 전신인 반공연맹 용인시지부가 성금을 모아 1985년 10월 높이 12m 규모의 위령탑과 위폐(88위)를 건립했다. 한국자유총연맹 용인시지부는 한국전쟁 당시 양지면 대대리 일원에서 북한군에 끌려가다 무차별 학살된 187명의 민간인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해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참전용사기념전시실

용인시청 지하 1층에는 6·25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만든 ‘6·25참전유공자 기념의 벽’이 설치돼 있는 용인시참전용사기념전시실이 있다. 2011년 6월에 설치된 이 공간에는 지하 1층 중앙현관 진입로 왼쪽 벽면(가로 17m, 세로 2.5m)에 용인 출신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와 월남전 참전 용사(사망자 포함)의 이름과 계급, 군번이 동판에 기록돼 있다.

중앙현관에서 왼쪽 벽면에는 “그대들이 있어 조국의 자유가 있고, 그대들이 있어 세계의 평화가 있다. 그대들이 흘린 피, 그대들이 바친 몸,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리다. 우리는 영원히 지켜가리라”라는 글과 함께 참전용사들의 용맹한 모습을 묘사한 사진을 동판에 새겨 놓았다. 맞은편 벽에는 시각장애인 등이 지장을 찍어 만든 태극기가 눈길을 끈다. 하지만 동판 설치 이후 참전자 군번과 계급, 성명 등 오류가 다수 발견돼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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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량장전투 최대 격전지 좌·우갈등 민간인 학살도

전쟁의 상흔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특히 한국전쟁은 이념의 대립으로 한민족이 남과 북 둘로 갈라져 서로 죽고 죽이며 씻을 수 없는 생채기를 남겼다. 좌·우 이념의 대립은 민간인들의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그나마 반공인사들의 집단학살 사건은 양지면 대대리 반공희생자위령탑으로 역사에 남았다. 반면, 원삼면 사암리 안골 일대의 사금광 폐광 구덩이에 매장된 민간인 수백 명은 좌익분자로 체포돼 학살당했지만, 반공 이데올로기와 남북한 대치 속에 금기시 됐다. 이렇듯 한국전쟁은 용인지역에 커다란 피해를 남겼다.

68~9년 전 용인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용인읍지와 기흥읍지, 포곡면지와 원삼면지 등에 따르면 수지 풍덕천에서 국군 제1사단과 북한군 제3사단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북한군 2사단은 모현면을 거쳐 저항없이 김량장에 도착했는데, 유방동 무수막마을에서 국군 8연대 2대대와 교전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50년 7월 7일경 용인 전 지역이 북한군에 점령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인지역 좌익세력은 군인민위원회를 조직해 청년들을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했으며 이른바 인민재판을 열어 반공인사를 체포 학상했다. 그해 9월 21일 양지면 대대리에서 반공인사 187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1950년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탈환 이후 북한군에 부역한 이들을 색출하기 위한 반공유격대가 활동했는데,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햇던 좌익세력 수백 명이 체포돼 학살당하기도 했다. 용인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내주면서 북한군에 점령당했는데, 터키군이 김량장동을 탈환하고 151고지(현 기흥구 지곡동)를 점령하면서 다시 국군의 통제에 놓였다. 중공군의 개입에 따른 공방전 속에 수지구 죽전지역에서는 미국 전투기에 의한 오인사격으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것이 확인됐다.

옛 용인읍에서는 북한군과 터키군의 격전이 벌어진 ‘김량장 전투’와 ‘151고지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터키군은 1951년 1월 북한군과 중공군이 밀집해 있던 151고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비행기에 의한 폭격에 이어 터키군의 백병전으로 이어졌는데, 1월 25일부터 28일까지 김량장과 151고지를 장악하기 위해 벌어진 김량장 전투로 북한군과 중공군 474명이 죽고 23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 과정에서 기흥구 지곡동과 보라동 일대 주변 마을이 폭격으로 다수가 죽고 집이 전소된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터키군은 전사 12명 부당 31명으로 큰 전과를 올렸다. 터키군의 활약상을 기리기 위해 국방부는 1974년 9월 6일 기흥구 동백동에 터키군 참전기념비를 세웠

전쟁 당시 용인지역에서는 1400여명이 죽고, 월북된 인사가 100여명, 행방불명도 220여 명에 이르렀다. 또 120여명이 부상을 입었고, 1만5897호에 이르던 가구 중 2000여 채가 전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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