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모티브…옻칠로 작품 깊이 더해

 

서양화가 윤정녀의 작품은 강한 흡입력을 갖고 있다. 보는 순간 작품에 눈을 뗄 수 없다. 그가 만들어낸 자신만의 기법은 탄탄한 기본기와 섬세함까지 더해져 그만이 낼 수 있는 깊이를 담아낸다. 그런 그의 작품은 작가 인생 동안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윤정녀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과거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는 나름의 방식을 설명했다. 선이 잘못 그어져도 지우거나 포장하지 않고 그 자체를 인정해버린다. 실패조차도 자기 자신이니 감추고 없앤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것이다.

“결혼한 후 아이가 어려서 정말 정신없이 바쁠 때도 무리해서 개인전을 열었어요. 시간도 여력도 없는 상황에서 작품을 내니 모두다 마음에 들지 않았죠. 제 서명도 하지 않고 작품을 공개했고 전시가 끝나면 작품을 모두 갖다 버릴 정도였어요.”

절망도 윤 작가에게는 소중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그는 자신만의 기법을 창조해냈다. 작업을 하다 실패했던 방식을 오히려 ‘윤정녀 기법’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인생처럼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처음 계획대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도 그걸 살리기 위해 무던히 애쓰다보면 새로운 뭔가가 나와요. 바로 그게 창작이라고 생각해요.”

 

 

윤 작가의 기법은 여러 겹의 색을 올리고 사포로 긁어내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그만의 섬세함과 색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곁들여져 마치 자개를 올린 듯 오묘하고 아름다운 빛깔이 완성된다. 윤 작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옻칠을 가미해 완성도를 높였다. 옻칠은 잘못 다루면 온몸에 수포가 올라올 정도로 힘든 재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힘들어도 옻칠을 놓을 수 없었어요. 옻칠은 처음엔 둔탁한 색을 띄지만 햇빛을 머금고 공기와 닿으면 투명해지면서 색이 깊어져요. 작품에 옻칠을 가미하면서 보다 깊이 있어졌다는 평을 많이 들어요.”

윤 작가의 이 기법은 그의 주요 모티브인 양귀비와 만나 빛을 발했다. 어느 날 정원에 피어난 양귀비를 보고 윤 작가는 그의 오랜 주제였던 소외된 인간 군상을 떠올렸다. 꽃이 피기 전 꽃잎을 가득 담고 있는 꽃봉오리는 힘겨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잎이 피어나 빛을 보면 그나마 다행이다. 세상 구경 한번 못하고 꽃봉오리 그대로 시들어버리는 녀석들도 있다. 마치 소외된 인간처럼 말이다. 오랫동안 인간의 삶에 대한 화두를 그림에 담아왔던 윤정녀 작가는 그 양귀비를 보며 인간의 삶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렇게 ‘기다리며’ 연작이 탄생했다.

‘기다리며’ 연작은 작품 자체가 기다림의 연속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세상 밖으로 나오는 양귀비 꽃잎처럼 그의 작품은 나이프로 여러 겹, 여러 색의 아크릴 물감을 덧칠해 말리고 사포질을 한 후 다시 쌓는 무수한 손길을 거친 후에야 완성된다. 여기에 옻칠을 올려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의 작품이 강한 흡입력을 갖는 이유다.

“젊은 시절엔 유명한 화가, 성공한 화가가 꿈이었어요. 그래서 전시도 전쟁을 치르듯 힘들게 준비하고 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욕심을 내려놓게 되더군요. 그저 작업을 하는 게 좋아서 그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제 작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작가에게 작품은 또 다른 자기 자신이며 자식과도 같은 존재라고들 한다. 힘겹게 완성한 작품에 서명조차 못했던 나날들을 묵묵히 견뎌왔기에 지금의 그가 있다. 그 과거를 감추지 않고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의 작품이 그래서 좋다. 실패해도 ‘괜찮다’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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