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전우의 무덤과 고철(오른쪽에서 두 번째). 1945년

 용인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는 한국 성리학의 시조이자 충신의 상징인 포은 정몽주 선생이 모셔져 있지만, 그 옆 종산에 독립운동가가 묻혀 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바로 포은의 24대 종손인 고철 정철수이다. 그는 1922년 포은 후손들의 수백 년 집성촌인 능원리에서 태어나 1930년 모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수원보통학교 2년을 다닌 후 1942년 현 고려대학교인 보성전문학교 상업과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했다.

재학 도중 결혼해 뱃속 아이까지 있었건만,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정철수와 같은 4385명의 청년들을 군대로 끌고 가려 징병제를 실시했다. 정철수는 가족들과 눈물의 이별을 한 후, 1944년 봄 중국 산동성 제남의 관동군 부대에 배치됐다. 이등병으로 훈련받으면서 갖은 민족차별과 모욕을 참아가며 기회를 엿본 그는, 드디어 3월 25일 동료 두 사람과 함께 탈출을 감행해 성공했다. 천신만고 끝에 일행은 중국의 팔로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에 도착해 조선독립동맹 부대인 조선의용군으로 인도됐다.

정철수-나의 청춘

조선의용군이 된 정철수는 항일 무장투쟁의 근거지인 태항산에서 한글학자인 김두봉과 김무정 장군, 김창만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환대를 받았다. 가족의 피해를 막기 위해 고철이라 이름을 바꾼 그는 화북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소대장 직을 맡아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학도병 탈출 과정을 주제로 연극 대본을 집필해 중국인들에게 항일선전을 했고, 문필로 신문제작에도 참여했다. <태양기 아래의 사람들>이란 주제의 연극을 비롯해 희곡 <조선은 살았다>와 <개똥이와 이쁜이> 그리고 풍자극 <이발소> 등을 무대에 올려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던 중 꿈에 그리던 해방의 기쁨을 맞게 됐다. 하지만 그는 정치 간부로서 중요 책임을 맡고 있어 곧장 귀국할 수 없었다. 그가 소속된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길림성 연변으로 들어가 토비와 친일파를 축출해 동포들의 호응을 받았다. 이후 길동군분구 정치부의 선전교육부에서 선전과장을 맡았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연변일보에 희곡을 투고했고, 1948년 4월부터 연변일보사에 입사해 편집을 담당했다. 그러던 중 그는 조선동포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1949년 4월 1일 길림중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는 한편, 교사로 활동했다. 다른 조선의용군 동료들과 달리,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1952년까지 길림중학교 사택에 머물러 교사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서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시대의 광풍을 피할 수 없었으니, 반우파 정치개혁운동에 연루되고 말았다. 마오쩌뚱 주석의 주도로 전개된 이 운동은 고위직에 오른 조선족 지식인들에게 모욕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다행히 누명을 벗은 그는 연길시로 이주해 제2초급중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문학을 강의했다. 하지만 1957년부터 20년 간 일기 시작한 문화대혁명의 광풍을 피할 수 없었다. 정철수는 교단에서 쫓겨나 잡역 노동자, 개간사업의 잡역과 보일러공으로 일하면서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다행히 1979년 길림성 성장의 노력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복권됐다. 또한 연변대학 일본어과 교수로 추천돼 1984년까지 일본문학을 가르치다가 퇴직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한국의 KBS 방송국에서 진행한 이산가족 찾기에 참여해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와 상봉하게 됐다. 무려 41년만인 1984년 그리던 고향 땅을 밟게 됐다.

일제포스터

그는 영구귀국을 결심하고, 중국에서의 조선민족문화 정리에 나섰다. 원로 조선족 작가들과 함께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를 발간했는데, 모두 4권으로 조선의용군 역사 등이 실려 있다. 나아가 자신의 역정을 기록한 수기인 『나의 청춘』을 비롯해 <호가장전투> <동틀무렵> <태항산에서 잠든 일본인> 등 육필원고를 집필했다.

정철수는 1986년 10월 10일 귀국한 지 3년만인 1989년 2월 17일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왜 북한으로 들어가 출세하지 않았냐는 아들의 질문에 “동족 간의 전쟁에 나설 수 없었고, 포은의 종손으로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답했다고 한다. 개인의 출세보다 조국의 평화와 민족교육에 힘쓴 포은 선생의 후예, 자랑스러운 용인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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