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작 ‘흔적’으로 인간사 표현

프랑스 화가 마르크 샤갈의 푸른색은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샤갈은 뮤즈인 벨라를 잃고 가슴을 짓누르는 슬픔을 모든 빛을 감춘 낮은 채도의 푸른색으로 표현했다. 그의 화폭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정제된 푸른색은 슬픔을 넘어 환상적이고 신비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가 얼마나 고뇌하며 그 푸른색을 만들어냈을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샤갈의 푸른색에서 볼 수 있듯 색은 화가에게 언어이고 감정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체다. 색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작가의 역량을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을 정도다.

서양화가 호정아는 그런 면에서 ‘색의 달변가’라는 별명을 붙이고 싶은 작가다. 그의 감각적이고 세련된 색감은 화가 호정아만이 만들 수 있는 색이다. 호 작가가 주로 모티브로 사용했던 꽃은 익숙한 주제임에도 진부하지 않다. 때론 강렬하고, 때론 맑고 청명한 느낌의 꽃 작품들은 ‘고급스럽다’는 말이 딱 맞는다.

“색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요. 기본 색은 정해져 있지만 미세한 차이에도 정말 다른 색이 될 수 있어요. 제 그림에 들어가는 색들은 호정아만이 만들 수 있는 색이었으면 해요.”

호정아 '카라' 연작 중 하나

호정아 작가는 스케치를 하지 않는 작가다. 100호 이상 대작도 스케치 없이 그림 앞 작가의 느낌대로 작품을 완성한다. 그의 이런 작업 방식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보다 느낌과 해석을 곁들여 새롭게 구성하기 위함이다. 호 작가가 한동안 즐겨 그렸던 ‘카라’ 시리즈 역시 빛의 방향이나 각도, 배경의 색이나 면과 선의 배치를 통해 각각 다른 느낌을 자아냈다. 주요 모티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색과 구성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작품을 마주한 그 때 작가의 느낌에 따라 자유롭게 변한다. 물론 호 작가의 색에 대한 감각은 그 즉흥성에 세련미를 가미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다.

다양한 꽃 오브제로 한동안 이름을 알렸던 호 작가가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회화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흔적’이라는 새 연작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용인미술협회에서도 많은 제자를 양성했던 그가 돌연 늦깎이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뭘까.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부족함을 느꼈어요.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생각에 힘들었죠. 고만고만한 그림을 그리기 싫었어요. 그러다 공부를 결심했어요.”

호정아 작가가 지금의 자신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한 이후 변신은 놀랍다. 그동안 호 작가에게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면모가 담긴 ‘흔적’은 그 어떤 모티브도 등장하지 않은 채 색에만 의존한다. 붓뿐만 아니라 나이프, 빗자루 등 다양한 도구를 활용해 아크릴 물감을 수십 번 올려 완성한다. 수많은 손길을 거친 캔버스는 마치 대리석처럼 묘한 무늬를 만들어낸다.

“인간이 살아오면서 남기는 세월 속, 관계 속 흔적들은 쌓이고 쌓여 때로 퇴색되기도 하지만 대리석처럼 단단해지기도 해요. 그 흔적들을 서로 보듬고 매만지며 가는 길이 바로 인생이죠. ‘흔적’에는 그런 인생의 순간순간이 담겨있어요.”

‘흔적’은 점점 변모하고 있다. 대리석의 오묘한 느낌은 살리고 그 위를 다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덧칠하면서 시험을 거듭하고 있다.

“그림은 언제나 제 인생에서 1순위였어요. 잠을 잘 때조차도 작품을 고민하고 또 고민해요. 그게 그저 행복하기 때문이에요. ‘흔적’이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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