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준 대한독립선언서

스승의 은혜가 그리운 오월, 용인의 큰 스승 여준 선생을 떠오르게 된다. 여준(呂準) 선생은 1862년 용인 원삼면 죽릉리에서 태어났다. 외가인 해주오씨 가문의 한학을 배운 그는 20살 과거에 급제해 서울 회현동 종형 여규형의 집에서 공부했다. 이 무렵 저동(지금의 명동) 일대 삼한갑족으로 유명한 이회영·시영 형제와 그의 종친 이상설과 죽마고우로 지내며 신학문을 익혔다. 그가 24살 무렵인 1885년 이회영·시영 형제와 이상설 등은 8개월 동안 신흥사란 절에서 합숙하면서 영어와 법학, 수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4년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켜 외교권을 강탈하려 하자, 여준은 이상설과 함께 을사늑약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신민회 비밀회원들이 북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계획으로 서전서숙을 세우게 되자, 이상설의 뒤를 이어 숙장을 맡아 74명을 졸업시켰다. 하지만 학교는 일제의 감시와 방해, 재정난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1907년 국내로 돌아온 여준은 평북 정주에 세운 오산학교에서 교무업무를 맡아 역사와 지리, 법학 등을 가르쳤다. 이어 고향인 용인 원삼면 죽릉리(390-1번지) 외가의 집을 빌려 학교를 세웠는데, 주위 산봉인 구봉산과 쌍령산·문수산을 따 삼악소학교(현 원삼초등학교 전신)라 지었다.

학교는 역사와 지리 과목에 비중을 둬 민족교육을 가르쳤는데, 죽릉리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광선은 그의 자필 이력서(1962년 작성)에 1911년 3월 소학교를 졸업한 데 이어 1913년 3월 고등과를 졸업했다고 기록했다. 삼악학교는 국권침탈 이후 일제에 의해 폐교되고 말았다. 여준은 오광선을 서울 상동청년학원에 진학시키고, 이어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 망명해 교관으로 지내도록 후원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게 되자, 이회영 등 신민회 간부들은 서간도의 유하현 삼원포 합니하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세워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여준 역시 1911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친지를 인솔해 압록강을 건너 신흥무관학교에 도착해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매서운 서간도 추위와 빈곤한 식량 사정, 마적의 침탈과 일제의 감시와 간섭 등에 시달리면서도 무료 숙식과 정규 군사훈련을 시키는 신흥무관학교에서 그는 역사와 지리, 영어와 군사교육을 가르쳤다. 1913년 이상룡의 뒤를 이어 교장에 취임해 1917년까지 학교 일을 전담했으니 신흥학교의 산증인이라 하겠다.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혹독한 추위에도 매일 체조와 애국가 제창을 시킨 엄격한 분으로 명성이 높았다(<허은 회고록>).

1917년 길림으로 옮겨 동성한족생계회를 조직해 이주 한인들을 도운 그는 1919년 2월 자신의 집에서 김교헌, 이상룡, 박용만, 박찬익, 황상규, 김좌진 등 대표적 무장투쟁가들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 이어 39명 명의로 유명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는데, 선언서는 만주와 북경, 상해는 물론 국내에도 배포돼 3·1독립선언서의 초석이 됐다.

1919년 3·1혁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만주의 여준은 서로군정서를 조직해 이상룡에 이어 부독판에 취임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상해 임시정부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으로 분열되자,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는 결의서를 작성했다. 그는 1922년 액목현에 검성중학교를 설립했고, 1929년 농업주식회사 생육사를 조직했다. 이듬해에는 북만주 민족운동을 주도할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했다. 70세를 바라보는 노년이었지만, 고문을 맡아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길림성을 점령하게 되자 쫓겨가야 했다. 이때 퇴각하는 과정에서 중국군에 의해 선생과 아들이 안타깝게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물론 고향 땅에 친척이나 어떠한 유품도 남지 않아 동작동 국립묘지 무후선열단에 덩그러니 위패만 있다. 그의 민족정신이 스며있는 처인구 원삼면 삼악학교 터와 오광선 3대 독립항쟁기적비도 SK하이닉스 부지로 수용된다는데, 세계 독립전쟁사에도 기록될 용인의 명소를 보존하는데 지혜를 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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