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5월, 일제의 침략과 그에 맞선 3·1혁명은 단란했던 대한의 모든 가정을 뒤흔들어 놓았다. 독립지사를 배출한 모든 가문에는 어른과 남편, 자식을 일본군에게 잃을지 모른다는 긴장과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뒷바라지해야 했던 숱한 아내와 어머니들이 있었다. 용인 처인구 이동읍 화산리 출신의 정정산은 3대에 걸쳐 독립지사를 배출한 대표적인 민족의 어머니가 아닐 수 없다.

그녀는 14세 어린 나이에 이웃 마을인 원삼면 죽릉리의 17세 소년 오광선과 결혼을 하게 됐다. 신혼 때부터 그녀는 포수로 의병에 참전하다 체포된 시아버지 오인수(본명 경수, 1867~1935) 의병장 옥바라지부터 고단한 삶을 체험했다. 삼악학교 교장인 여준 선생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남편 오광선(본명 성묵, 1896~1967)이 1913년 서울의 경성청년학원을 졸업한 후 1915년 홀로 만주로 망명함에 따라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다.

만세항쟁이 전국을 휩쓸어 마음을 졸이던 1919년 봄, 중국 만주로부터 6년 만에 기다리던 남편의 편지가 당도했다. ‘서간도 합니하에 여준 선생 지도로 신흥무관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교관으로 일하고 있으니 시아버지와 함께 오라’는 전갈이었다. 그녀가 남긴 유일한 증언록에 의하면, 지체 없이 “간단한 살림도구를 챙겨 용인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지나 명죽리에서 내렸고, 육로를 한달 동안 걸어 만주로 들어갔다.”(<주간여성>1974). 피나는 여정 끝에 합니하에서 남편과 눈물의 상봉을 한 후 짧지만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일가는 화전을 일구고 옥수수와 조를 심어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 쌀을 구할 수 없었지만, 교관인 오광선이 불현듯 부하들을 데려와 밥을 먹여 식량은 늘 비었다고 한다.

이후 오광선은 서로군정서 중대장과 대대장 등을 맡아 청산리·봉오동전투 등에 참전했다. 특히 1921년 6월 독립군의 최대 참극인 ‘자유시참변’을 겪었으며, 바이칼호를 맨발로 탈출해 참상을 알렸다. 정정산 일가는 독립군을 따라 액목현으로 옮겨 정착했는데, 이곳에서 첫딸인 희영과 둘째 희옥을 낳아 길렀다. 억척스럽게 농사지으며 독립군을 뒷바라지하며 얻은 별명은 ‘만주의 어머니’였다고 한다.

주간여성(1974)

1931년 7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오광선은 이청천․홍진 등이 결성한 한국독립당에 가입해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동했다(<오광선 이력서>).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길림구국군과 합류해 한중연합군을 결성해 경박호전투(1933. 1)와 대전자령 전투(1933. 6), 동녕현 전투(1933. 9) 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한중연합군이 공산주의자들의 방해로 해체되기에 이르자, 1933년 11월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연락으로 중국 관내로 철수하게 됐다. 정정산 가족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남경으로, 그리고 기강을 거쳐 최후의 항쟁지 중경에 정착했다. 중경 토교라는 작은 마을에서 폭격을 피해 요인들 뒷바라지를 했다. 하지만 1936년 오광선이 김구 주석의 지시에 따라 북경으로 파견됐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정정산과 어린 3남매는 임정 식구들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고, 여사는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이 결성되자 맹원으로 활동했다. 두 딸 역시 1939년 2월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해 선전 활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 광복군에 입대해 초모공작 등에서 활약했다. 맏딸 희영은 1944년 주석실 비서와 경호업무를 맡은 신송식과 김구 주석의 주례 아래 결혼식을 올렸다. 일가는 1945년 8월 해방 이후 광복군 국내지대장을 맡은 오광선과 국내에서 극적으로 상봉했다.

정정산 여사는 가족 중에 제일 늦은 1995년에 이르러서야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심사위원이었던 오광선 장군이 한 집에서 많은 훈장을 받으면 안 된다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평생을 의병장 옥바라지와 독립군을 먹여 살리고, 남편과 두 딸과 사위를 독립전쟁터에 보내야 했던 힘겨운 일생이었지만, 대한민국은 그녀가 사망한 지 5년 만에 훈장을 준 것이다.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준 대한의 어머니들 덕택에 오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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