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바꾼 임시정부는 4월 30일 오늘날의 국회에 해당하는 의정원 첫 회의를 가졌다. 용인 출신으로서 경기도를 대표한 임시의정원은 오의선(이명 희선, 于丹宇·禹丹宇)이다. 오의선은 1889년 용인군 원삼면 죽릉리 669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오희선과 우단우 등이 확인되는데 호적등본에는 오의선으로 나온다. 서울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30세의 늦은 나이에 제국의 심장부인 도쿄로 유학길을 떠났다. 1918~1920년에 작성된 조선총독부와 일본 내무성 보고자료인 『조선인개항』에 의하면, 오의선은 일본 메이지(明治)학원 재학생으로 표기돼 있다.

1919년 2월 8일 독립선언서 선포에 유학생 오의선도 적극 활동을 벌였다.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쿄를 떠난 오의선이 국내 고향으로 돌아왔는지, 곧장 중국 상해로 망명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향인 용인으로 돌아와 3·21 원삼면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징역 8월에 처해졌다는 주장이 있지만, 아직 판결문이나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없다. 1919년 5월 12일 일제가 상해 한인들의 동향을 조사해 보고한 자료 <독립운동에 관한 건(국외일보 제67호)>에 의하면, 4월 19일 임시정부 대의원에서 선출한 경기도 의원 중에 ‘오의선(용인·27세)’이란 이름이 확인된다.

이어 4월 30일부터 5월 12일까지 개회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제4회 기사록에서 홍진·손두환과 함께 그를 찾을 수 있다. 오의선은 5월 2일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재정방침에 관해 임시정부령으로 세금을 징수할 것과 내외공채 모집 등을 주장했다. 이어 의정원 세칙 제정과 청원법률심사 업무 등을 처리했다. 그는 공채 발부를 위해 재정통일기관을 설치할 것과 특파원을 파송해 이를 거둬들이자고 주장했고, 이는 1920년 3월 임시정부의 재정 방침으로 확정됐다. 오의선은 제5회 의정원회의에서 예산결산위원장을 역임했다.

오의선 의원

오의선은 1919년 7월 1일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적십자회의 상임의원으로도 활동하고 직접 국내에서 애국금을 모집하는 일에도 관여했다. 1921년 북경으로 간 오의선은 군사통일회의를 준비하던 박용만을 만나 무장투쟁 방략을 도모했다. 이들은 동지들을 국내로 파견시켜 독립자금 모금을 계획했다. 또 국내 각 지역에 폭탄을 운반해 두었다가 대규모 의열투쟁을 벌이자는 계획을 세웠는데, 국내 동지가 일제에 체포됨에 따라 수포로 돌아갔다.

1924년 3월경 오의선은 국내로 들어와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최남선을 사장으로 정치부장 안재홍, 사회부장 염상섭 등으로 구성된 신문사는 3대 민간지로 큰 영향력을 끼쳤다. 오의선은 기자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독립자금을 임정에 보내고 젊은이들을 규합했다. 특히 1925년부터 2년간 조선공산당 사건이 일어나 많은 청년들이 감옥에 갇히자, 동지들의 가족들을 돌보게 됐다.

동아보도

오의선은 1차 고려공산청년회와 관계됐고, 2차에는 경성부 간부로, 3차에는 후계간부로 활동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중국 간도로 도피해갔다. 이어 국제혁명자후원회에도 참여해 구속된 동지를 돕는 활동을 펼쳤다. 그러다 1931년 3월 14일 고향인 용인에서 피체돼 징역 3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됐다. 하지만 그는 복역 중 심한 고문으로 폐결핵과 복막염에 걸려 같은 해 5월 6일 43세 나이로 형무소 감옥에서 순국했다고 <동아일보>가 보도했다. 1980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2004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양됐다. 짧지만 굵은 그의 삶이 오늘날 국태민안과 통일한국의 희망보다 걱정을 안겨주고 있는 후배 정치지도자들에게 큰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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