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독립만세의 거대한 함성 바다를 일군 용인의 봄날은 잔인하게 눈부셨다. 만세함성에 놀란 일제는 시위가 잦아들자 잔혹한 보복에 나섰다. 각 동리를 돌며 마구잡이로 체포해 헌병대 지소로 연행했고,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가했다. 전국의 헌병지소와 경찰서가 곧 지옥 같은 고문현장이 됐고, 저항자와 주동자들은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용인의 만세운동으로 현재 서대문형무소 수형카드로 확인되는 이는 권종목·정규복·홍종욱·홍종엽·이덕균·한영규·김운식 등이다.

정규복

3월 28일 포곡면 삼계리 도사마을에서 한학을 가르치다가 만세운동을 이끈 권종목(당시 34세)은 언제 체포됐는지 알 수 없다. 일제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하며 만든 수형기록카드(국사편찬위원회 소장)에 의하면, 그는 5척4촌의 신장으로 수감 당시 얼굴 왼쪽 뺨에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일제는 그에게 보안법 위반 혐의로 1919년 6월 28일 1년 형을 언도했다. 권종목은 1920년 4월 28일 출소했다. 포곡면 둔전리 161번지에서 농사를 짓던 정규복(당시 20세) 역시 같은 3월 28일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그 역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1919년 5월 14일 재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받아 복역했다. 1920년 1월 28일 출소했다.

권종목
홍종욱

포곡면 금어리에서 농업에 종사한 기독교 신자 홍종욱(당시 27세)·종엽(당시 21세) 형제는 태극기를 만들어 주민 200여 명과 함께 금어리에서 대대리까지 독립만세를 외친 혐의로 피체됐다. 홍종엽은 일본 헌병대의 심문조서에서 “삼계리 방면에서 권종목이 선두에 서서 구한국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부르짖었고, 자신에게도 만세 부를 것을 요청해 함께 했다”고 당당히 진술했다. 두 형제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그해 6월 28일 재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각각 징역 10개월을 언도받아 복역했다. 권종목과 이인봉(당시 18세), 홍종욱·종엽 형제 등은 판결에 항소했으나 일제는 7월 8일 기각했다. 이들은 그해 1920년 4월 28일 출소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용인 내사면 남곡리에서 농사를 짓던 천주교인 한영규(당시 37세)와 같은 마을의 천주교도 청년 김운식(당시 21세)은 3월 29일 용인 내사면 양지리에서 주민 100여 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한 혐의로 붙잡혔다. 이들 역시 5월 13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돼 각각 징역 10개월에 처해졌다. 두 사람은 서대문 형무소에 8월 21일 입소해 이듬해 4월 28일 출소한 것으로 감시대상 인물카드에 기록돼 있다.

이덕균

3월 30일 수지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고기리 구장 이덕균(당시 41세)은 4월 초 일본 헌병들에게 피체됐다. 이덕균에 대한 판결문에 의하면, 그는 태극기를 휘두르며 군중을 인솔해 동천리로 행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했다. 판결문에는 4월 16일 신갈리의 일본 주재소장 앞으로 보낸 보고서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3월 말 동리 사환에게 각 집에서 1명씩 나와 동천리 방면으로 가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주지시켰다”는 것이다. 그가 이끈 시위대 300명은 풍덕천에서 수지면사무소로 몰려갔고, 그가 선두에서 구한국기를 들고 솔선했다. 시위대가 읍삼면 마북동으로 진출하려 하자 헌병대가 오후 2시경 강제 해산시켰다.

김명섭

일제는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주동자급 16명을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해 태형 90대에 처했으며, 이덕균을 수원지청으로 압송한 후 서대문 감옥에 수감했다. 구장인 그를 4월 22일자로 징계 면직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덕균은 5월 24일 재판에서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아 이듬해 4월 28일까지 복역했다. 잔인한 4월은 그러나 또 다른 찬란한 봄의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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