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닮은 한지공예 작품 매력”

‘수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종이’ 세계가 한지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보존성 때문이다. 200년이 지나면 변성되는 서양 종이와 달리 오랜 세월에도 긴 생명력을 유지하는 한지의 경쟁력은 원료인 닥나무 껍질에 있다. 닥나무 껍질에서 뽑아낸 인피섬유는 서양 종이의 원료인 펄프보다 훨씬 두껍고 질기다. 용인에 몇 안 되는 한지공예가 중 이영희 작가는 한지의 이런 긴 생명력에 매력을 느껴 섬유공예에서 한지공예로 주재료를 바꾼 경우다.

“결혼 후 한동안 작품에 손을 놓고 있었던 적이 있어요. 그 시기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오히려 공부가 되더군요. 쉴 때부터 틈틈이 그려온 아이디어 스케치만 열댓 권이 넘었죠.”

수년간 작품 공백을 깨뜨린 건 한지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차분하고 꼼꼼한 이 작가에게 한지는 그야말로 딱 맞는 맞춤옷 같았다.

한지공예의 매력은 보존성 뿐 아니라 작가의 손길에 따라 완성도가 크게 차이난다는 데 있다. 이영희 작가는 4대째 전통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며 종이를 만드는 장지방 원료를 사용한다. 이를 깨끗한 물에 곱게 풀어 틀을 앞 뒤 좌우로 흔드는 외발질로 한지를 뜬다. 한지를 뜨는 작업만 꼬박 10시간. 보다 완성도 높은 한지 제작을 위해 하루 동안 모든 작업을 끝내야 하기에 식사 시간 20분을 빼고는 작업에 매달려야 한다. 이 작가의 한 작품에 들어가는 한지가 20장가량 된다는 점에서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과 기다림이 담길지 짐작이 간다.

완성된 한지는 미리 조각해 작업해둔 스티로폼에 올려 수천 번 두드리는 과정을 거친다. 세밀하게 조각한 형태를 그대로 한지에 스며들도록 하기 위해 인내와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과정이다. 자칫 조금만 잘못 겹쳐 두드리거나 강도 조절을 잘못하면 작품은 이내 틀어져버린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결과물은 놀랍게도 자연 그대로의 것과 닮아 있다. 자연에서 갓 채취한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은 마치 예술 범위에서의 창조를 넘어 살아있는 생명을 탄생시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온다. 이 작가의 작품은 그런 점에서 그만의 매력을 충분히 내뿜는다.

사실 한지작가 이영희 작품은 작업 과정만큼이나 그 주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의 스피노자 시리즈는 특유의 사과모양 틀에 작가의 생각과 마음을 단순화한 부조작업으로 이뤄진다.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에서 영감을 받은 시리즈는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세상 속에서 묵묵히 나의 길을 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삶을 다양한 순간순간을 체험하는 여행으로 보고 ‘종착지인 죽음까지 내가 선택한 길을 걷겠다’라는 작가의 의도다. 열정과 끊임없는 도전, 끈질긴 희망, 조용한 사랑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투영돼 그의 스피노자 시리즈는 때로는 희망차고 때로는 절망적인 다양한 감정을 소화해낸다.

“작품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스티로폼에 조각하는 과정, 한지를 제작해 틀에 올려 두드리는 과정 모두 제 마음 속 모든 것을 담는 과정이기에 너무 소중해요. 마치 일기를 쓰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작품의 아름다움보다는 메시지 전달에 집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2017 스피노자' 이영희 작

그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사과모양의 틀은 결국 작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이다. 공간 안 배치된 나무, 꽃, 도형 등은 단순한 형태임에도 섬세한 요철과 부조 표현으로 관람객과 세밀한 소통이 가능하다. 작가와 관람객을 연결해주는 통로인 셈이다.

이영희 작가는 10월 마가미술관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좀처럼 개인전을 열지 않는 작가로 알려진 이 작가가 최신 작품 25점에서 30점을 공개하기까지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한지작업 자체가 제게 주는 행복이 정말 커서 사실 개인전 같은 전시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어요. 그런데 작품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을 때 빛을 발하잖아요. 제가 느꼈던 힐링, 마음의 울림을 관람객들도 느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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