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아침 8시 수지면에서는 이틀 전부터 시위를 계획한 고기리 구장 이덕균(李德均, 당시 41세)이 안종각(安鍾珏) 등 주민 100여 명을 규합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천리로 행진했다. 3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11시경 풍덕천리의 수지면사무소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다.

조선헌병대사령관이 육군대신에게 보낸 <전보:3월 29일과 30일 시위상황>과 조선총독부 문서에 의하면 “용인 수지면 풍덕천 부근에 폭민 2천 명이 소요를 일으켰다”고 기록했다. 그러면서 “헌병을 폭행해 발포 해산”시켰는데, 사상자가 2명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즉 이날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발포로 안종각과 보정리에 살던 최우돌(崔又乭) 등 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한 것이다.

일본 헌병수비대는 다음 달 각 동리를 돌며 남자들을 체포해 기흥면에 위치한 헌병대로 연행했다. 일제는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주동자급 16명을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해 태형 90대에 처했다. 고기리 구장 이덕균을 수원지청으로 압송한 후 서대문 감옥에 유치해 징역 1년 6월을 받게 했다. 더욱이 일제는 4월 22일자로 이덕균을 소요혐의로 구장에서 징계 면직시키는 치밀함도 보였다.

3월 31일 용인 서쪽 원삼면과 외사면(지금의 백암면)·남사면에서도 항쟁이 일어났다. 조선총독에게 보낸 <(극비)독립운동에 관한 건(제34보)>에 의하면 “31일 원삼면 사암리에서 약 300명의 폭민이 운동을 개시해 헌병의 제지를 뿌리치고 보조원의 총기를 빼앗고 곤봉을 휘두르거나 돌을 던지는 등” 강렬한 저항을 전개했다. 이에 일본군이 발포해 시위대 2명이 사망하고 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원삼면 좌항리 황경준(黃敬俊)과 사암리 최상근(崔相根) 등 10명의 판결문에도 생생히 나와 있다. 이날 송전리에서도 약 200명이 만세를 불러 주재한 헌병들에 의해 해산됐다고 한다.

4월 2일 경기도장관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에게 올린 <소요사건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3월 31일 오후 외사면에서 3000명의 시위대가 면사무소에 집결해 만세시위를 벌이고, 백암헌병주재소를 습격했다. 헌병들은 곧 시위대에 발포해 해산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사망자 1명, 부상자 약간명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남사면에서도 같은 날 시위대가 면사무소를 습격해 면장을 구타했다. 이에 면장은 피신해 송전리 헌병출장소에 밀고해 헌병들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민 200명이 다음날 4월 1일 남사면사무소를 포위해 면장이 피신하고 말았다.

일본헌병사령관이 그해 4월 말 육군 차관에게 올린 <조선 소요사건 일람표>에 의하면, 4월 2일 용인 남사면에서 500명, 창리에서 400명이 기독교·천도교인, 농민들이 합세해 격렬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2명이 검거된 것으로 보고됐다. 3일 외사면 백암리에서도 시위 움직임이 있었으나, 일제 관헌에 의해 사전에 저지되고 말았다. 100년 전 용인인들은 독립을 위한 처절한 봄날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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