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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수선은 사장님이 최고야’ 한 마디에 힘들어도 버텼어요”창간특집 동네방네 사람들] 상현1동 구두 수선소 박종항 씨

40년 제화공 손길에 먼 곳서도 찾아

상현1동주민센터 사거리 인근에서 구두 수선소를 운영하는 박종항 씨

“13살부터 구두를 만들었어요. 바늘과 실, 송곳으로만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의 마지막 세대였죠. 저 이후로는 다 접착제로 붙여 만드는 걸 배웠을 거예요.”

상현1동에서 18년째 구두수선집을 운영하고 있는 박종항(67) 씨는 37년 경력 제화공 출신이다. 박 씨는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한 후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구두 제작 기술을 익혔다. 1960년대는 기성화는 없고 수제화를 신던 시대였다. 제화공 월급이 대기업 회사원보다 많던 시절, 회사원부터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까지 양화점에서 구두를 맞춰 신었다. 그야말로 기술자의 기술을 제대로 대접해주던 때였다. 그러나 구두를 기계로 찍어내는 기성화가 나오면서부터 양화점(구두 맞춤제작 업소)은 점점 갈 곳을 잃기 시작했다. 박 씨 역시 빚을 내면서까지 어렵게 마련했던 양화점 문을 닫고 구두 공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박종항 씨는 고향 청주부터 유명 구두 기업이 있던 성남시까지 제화공 인생을 40여년 간 이어왔다.

“나중에는 공장장까지 했었죠. 근데 구두 공장도 젊은 층을 선호하게 됐어요. 50살 때 스스로 나와 구두 수선을 시작했죠. 배운 게 구두 만지는 일이니 다른 선택은 없었어요.”

2000년대 초반 용인 수지구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도시가 생성되는 시기였다. 덕분에 하늘의 별따기라던 구두 수선소 자리를 하나 구할 수 있었단다.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편의시설 중 하나인 구두 수선소가 늘어야 했기 때문이다.

박종항 씨는 초기 미분양이 많아 텅텅 비어 있던 길 건너편 아파트 단지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불이 켜진 집이 몇 채 되지 않아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던 상현동은 박 씨가 자리를 지켰던 18년 간 몰라보게 인구수가 불어났다.

수선소를 차린 초기 ‘몇 개월 못 버티겠구나’하는 생각은 다행히 6개월 후 박 씨의 실력을 알아본 손님들의 입소문이 퍼지면서 안정되기 시작했다. 구두를 제작하던 전문가의 손길이니 수선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떤 손님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이후에도 구두를 들고 제게 오세요. 구두는 저에게만 맡겨야 한다고요. 심지어 캐나다, 미국, 독일에서 친정 온 길에, 한국 잠깐 들어온 김에 왔다면서 신발을 한보따리 맡기고 가세요. 여기 아니면 못 믿겠다고 하시면 그렇게 보람되고 뿌듯할 수 없어요.”

한 평 남짓한 곳에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하루 종일 앉아 수선 일을 하다보면 몸도 힘들고 머리도 지끈거릴 수밖에 없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문을 활짝 열고 있지 않으면 접착제 냄새 때문에 버티기 힘들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다 고쳐진 신발을 만족스럽게 받아드는 손님 때문이란다.

지난해 11월 박종항 씨는 병을 얻어 한 달 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박 씨가 쉬는 동안 주민들은 그의 빈자리를 안타까워하며 진심으로 쾌유를 빌어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주며 빨리 나아 복귀하라고 응원해줬다. 이웃의 정이 이런 거구나 느낄 수 있었다.

“집안이 어려워 공부도 못하고 구두만 만져온 인생이에요. 그런데도 손님들이 신발만큼은 절 믿고 맡겨주시니 얼마나 좋아요. ‘수선은 사장님이 최고야’하고 치켜세워주면 피곤함이 사라지지. 내 몸이, 눈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이 자리를 지킬 거예요.”

황연실 기자  silsil47@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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