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여 년 전 용인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은 세계 최강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구식 화승총과 낫으로 맞서는 의병들과의 전쟁터였다. 일본 침략군과 친일 관료들은 민초들로 구성된 항일의병들을 ‘폭도’라 불렀다.

1909년 조선통감부 경무국에서 발간한 《폭도에 관한 편책》과 1913년 펴낸《폭도사편집자료》(국사편찬위원회), 재판기록(국가기록원 소장) 등을 살펴보면 저들의 인식을 금방 알 수 있다. 외교권과 군사력을 빼앗긴 노예의 나라에 절망하지 않고 기꺼이 ‘폭도’라 불리며 당당히 맞서 싸운 의병들. 그 한복판에 정주원과 황명운·신현구·임허옥 등 용인 의병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정주원

재판기록에서 ‘폭도수괴’인 정주원(鄭周源)의 주소지는 죽산군(현 안성시) 원삼면 하수리로 돼 있다. 하지만 충남관찰사가 내부대신에게 올린 보고서인《폭도사편집자료》에는 충남 당진군 고대면의 양반 출신으로 기록돼 있다. 1907년 원삼면으로 이주해 농사를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뒤 의병에 투신했다.

정주원은 용인 굴암(사)에 있는 3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양지와 양성군으로 진출, 150여 명으로 확대하고 총기·탄약을 갖추며 의병대장이 됐다. 8월 25일 안성에서 열린 의병 회의에 참가했는데, 29일 새벽 일본군 40명의 습격을 받아 교전했다. 부대는 9월경 양지군과 안성군에서 900여 명에 이르렀다. 1대는 정주원이 인솔해 수원으로, 2대는 양지·죽산에서 진출했다. 11월에는 충청도 당진·풍도·서산 등지에서 일본군 분파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1908년 초 정주원 부대는 다시 안성·양지로 나아갔다. 이 무렵 원삼면 능촌(능말)과 사동, 요봉골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는데, 이때 여러 의병이 전사했다고 한다. 정주원은 그해 7월 19일 충청도 해미군에서 일본군 성환수비대에 체포됐다. 그는 경기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해졌으며, 1925년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현구

정주원 부대에 참가한 용인 의병이 적지 않다. 원삼면 능말 출신인 황명운(黃明云)은 1909년 4월 양지 고동면 양림동에서 체포됐으나 탈출을 기도하다가 총에 맞아 순국했다. 원삼면 분촌(현 두창리) 출신의 24세 신현구(申鉉九)는 백암리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인 3명을 곤봉으로 살해한 혐의로 1910년 8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외에도 최국만(崔國萬)·박덕삼(朴德三) 등이 정주원 의병부대에 참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임허옥

용인 출신 농사꾼 임허옥(林許玉)은 1907년 8월 윤관문 의병부대에 가담해 용인·안성 일대에서 활동했다. 그는 동지 60여 명과 함께 용인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했고, 안성에서 일본군과 전투에 참여했다. 1908년 4월 다시 활동하다가 체포돼 그해 7월 21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유형 10년을 받고 복역했다. 110년 전 용인 전역에서 침략자들에 맞서다 장렬히 숨진 그들, 나라를 어지럽힌 ‘폭도’가 아닌 ‘항일지사’로 정당한 예우를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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