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옥여에 대한 기록

2019년에도 대단한 인기지만, 120년 전 대한제국기에도 공직자가 된다는 건 가문의 영광이자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해가는 마당에 자신의 관직만 올라간다는 건 글 배운 이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국록을 먹는 공직자 중 국란을 맞아 의병장이 된 용인인으로 임옥여를 꼽을 수 있다.

임옥여는 본명이 경재로 1872년 용인 양지군 평창리 평촌(坪村)에서 무장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10년인 1906년 1월 25일자 관보에 의하면, 임경재는 ‘외국어학교 부교관서차임관 8급’에 임명됐는데, 이듬해 농상공부주사로 전근한 것으로 보인다. 1907년 8월 일제가 군대를 해산시키고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자, 전도양양했던 공직자 임옥여는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린다. “역적들아 머리를 숙이고 들으라”는 글로 시작되는 그의 격문은 “지난 을사(1905년)의 5조약으로 우리 2천만 동포가 노예의 비참한 경지로 몰려 들어가게 되었느니 큰 죄가 하나요”로 모두 25개에 이르는 죄악을 성토했다. 이어 포군들을 모아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근풍(李根豊) 도총대장을 돕는 좌익장을 맡았다.

1909년 3월 16일 경기도관찰사(김사묵)가 내부대신(박제순)에게 보고한 《폭도사편집자료-경기도편》(국가기록원 소장)에 의하면, 당시 36세인 임옥여는 1907년 8월 21일 ‘국운에 분개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스스로 이천창의소에서 좌장을 맡아 이천 읍내에서 일본군 기병과 교전해 이들을 격퇴했다. 이후 임옥여 의병부대는 여세를 몰아 광주와 양근(현 양평)으로 진출해 다시 8월 30일 이천읍내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부대는 용인 원삼면 굴암사 인근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포군들을 모집해 안성과 광주·양평·죽산 지역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폭도사편집자료- 경기도편

임옥여 의병부대는 광주와 용인 백암, 죽산(현 안성) 등지에서 친일 앞잡이인 일진회 회원 4명을 비롯해 일본인 순사 등을 처단했다. 또한 용인에서 같이 의병장이 된 정주원 부대와 연합해 포군 1800여 명으로 세력을 늘린 뒤 1907년 9월 14일 안성 시내를 습격해 우편취급소와 순사분견소를 파괴했다.

이러한 활동에 위협을 느낀 일본군은 서울의 정예 수비대를 용인으로 파견했다. 일본군 수비대는 양근에서 죽산군 원일면으로 행군하는 임옥여 의병부대를 원삼면 고초골에서 습격해 큰 손실을 입혔다. 이에 임옥여는 패전한 의병 33명을 집합시켜 시세가 따르지 못함을 분통해한 후 일시 해산하기로 했다.

임옥여는 1907년 11월 10일 홀로 고향집에 잠시 들렀다가 일진회 회장인 송병준과 용인 추계리 자신의 별장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일진회 회원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임옥여는 일진회원들을 크게 꾸짖고 매국노 5적을 힐책하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함이 나의 길이다”라며 저항했다. 일본군수비대 대장은 그의 신원을 확인한 후 심문도 하지 않고 현장에서 총살했다. 결국 임옥여는 순국하고 말았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는 공직자의 당당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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