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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세계 일주한 대한제국인 민영환, 유서로 의병항쟁을 부르다
  • 김명섭(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
  • 승인 2019.02.26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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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유서

1896년 4월 1일 고종황제의 특명전권공사로 민영환은 인천항에서 러시아 함대에 올랐다. 윤치호와 김득련·김도일·손희영을 수행비서로 삼았고 통역으로 스테인을 대동했다. 명성황후가 잔혹하게 시해당하는 국치를 뒤로한 채 인천을 떠난 일행은 중국 상해와 일본 도쿄를 거쳐 태평양을 건너 미국 뉴욕의 번화가를 방문했다. 이어 대서양을 건너 영국과 아일랜드․네덜란드․독일․폴란드를 거쳐 러시아 경내로 들어갔다.

민영환 일행은 거대한 군사기지와 번화한 문화도시인 뉴욕·런던·파리를 방문해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열강의 간섭으로 식민지로 전락한 폴란드 현실을 보고 동병상련을 느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일행은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한편, 외무상 로마노프와 회담해 재정고문과 군사고문 지원 약속을 받았다. 일행은 시베리아 횡단을 거쳐 연해주에서 동포들을 만난 후 6개월 만에 인천항으로 귀환했다. 세계를 일주한 최초의 한국인이 탄생한 순간이다. 이듬해에도 그는 영국과 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유럽 6개국을 순방했다.

세도정치로 민중의 지탄을 받던 척족의 한 사람이었지만, 민영환은 두 번의 외유를 통해 개화파로 변신했다. 그는 「해천추범(海天秋帆)」을 저술해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정치․군사 제도의 근대적 개혁과 재야의 자주민권운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세도정치에 물든 보수세력과 친일 관료들의 반대로 뜻을 펴지 못했다. 1904년 내부와 학부대신을 맡아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며 구국강병을 외쳤던 민영환은 결국 한직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해 버리자, 민영환은 상소를 올려 5적의 처형과 조약 파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궁궐을 장악한 일본 군대에게 끌려 나와야 했다. 11월 30일 그는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 세 통을 남겼다.

민영환 혈죽

“슬프도다. 국치민욕이 드디어 이에 이르러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속에서 멸망하게 되었다”로 시작되는 그의 유서는 참담하다. 하지만 글의 말미에서 그는 “동포형제들이 결심유력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 마땅히 명명한 속에서 즐겨 웃으리니, 슬프나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라며 분발을 촉구했다.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전 좌의정을 비롯해 여러 인사들의 순정자결이 이어졌다.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니, 그가 남긴 유서가 큰 자극이 됐다. 농상공부 주사라는 공직을 버리고 용인 의병장이 된 옥여 임경재를 비롯해 13도 창의대진소를 이끈 허위 의병장 등이 대표적이다.

충정공의 묘는 애초 용인 수지면 풍덕천리 토월마을에 봉분 없이 평장됐으나, 1942년 후손들에 의해서 지금의 기흥구 마북동 자리로 이장됐다. 2005년 11월 고려대박물관에서 서거 100주년을 맞아 특별전을 열어 서예작품 등 유품들을 선보인 바 있고, 2018년 수원박물관에서 친필서첩을 최초로 공개한 바 있다. 민영환의 피가 묻은 옷을 보관한 마루에서 자란 혈죽이 그려진 사진과 유품들을 언제쯤 용인에서 만날 뵐 수 있을지 기다려진다.

김명섭

김명섭(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  webmaster@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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