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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최초 순국 이한응의 114년 전 일기와 편지
  • 김명섭(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단국대 사학과&
  • 승인 2019.02.12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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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만세를 부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 지 100년이 된다. ‘시위를 넘어 혁명으로’ 그리고 ‘황제의 나라에서 백성의 나라’로 바꾸는 거대한 역사의 물결에 용인 선조들도 1만3200명 이상 참여해 숱한 피눈물을 흘렸다. 임시정부 경기도 의원을 비롯해 만주 독립군, 의열단원, 광복군 등으로 항일전쟁에 나섰다. 이에 본지는 100년 전 선조들의 뜨거운 투쟁 의지와 애향정신이 담긴 유품과 역사자료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체험하는 시간여행을 갖고자 한다. 독립지사들의 피어린 항쟁과 이를 탄압하려는 일본 침략자들의 생생한 사료를 통해 선조들이 죽음으로 남긴 유훈과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상을 그려보려 한다. ‘사료로 보는 용인독립운동사’를 연재하는 김명섭 박사는 단국대 사학과 강사로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위례역사문화연구소 연구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종황제의 치제문

1904년 2월 8일 일본군 연합함대가 중국 뤼순항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함에 따라 한반도 패권을 둘러싼 치열한 전쟁이 시작됐다. 국토를 무단점령하고 황제를 겁박해 전쟁물자와 백성들을 동원시킨 일본은 전세가 유리해지자 조선의 외교권마저 빼앗으려 했다. 31살의 나이에 영국 주재 공사서리로 임명된 용인 이동읍 화산리 출신 외교관 이한응은 날로 치열해지는 열강들의 외교전 한복판에서 고군분투해야 했다.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유럽에 상주하며 한반도 정세를 수집해야 했던 이한응은 수시로 영국 외교부를 찾아가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주창했다. 하지만 이미 일본과 동맹을 맺어 조선 지배를 인정하려는 영국 정부에게 그는 한낱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영국과 프랑스·러시아·일본 4개국이 평화조약을 맺는 길이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 역설했다. 일제는 1905년 2월 한일의정서를 만들어 이한응 등 외교관을 소환하라고 고종을 압박했다. 그의 일기에는 영국 정부의 냉담한 반응과 일본 자객의 살해 위협 등 약소국 외교관이 겪어야 했던 참담한 심경이 아로새겨져 있다.

이한응 일기

마침내 1905년 5월 12일 아침, 이발과 사진 촬영을 마친 이한응은 유서 한 장을 남긴 채 미련 없이 독약을 마셨다. “오호라! 나라의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의 평등이 없어졌으니,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다. 진실로 혈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참고 견디리오. 나라가 장차 무너지고, 온 민족의 남의 노예가 되리라. 산다는 것은 욕만 더할 따름이다.” 이국땅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한응은 일본과 영국 정부에 항거하는 한편, 후손들이 깨어나 나라를 되찾아 주길 당부한 것이다.

김명섭

이한응의 유해는 고종의 특별지시로 고향인 이동읍 덕성리에 모셔졌고, 서울 장충단공원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외교부 외교사료관에는 유족들이 기증한 이한응 열사의 친필 일기와 여권, 고종황제의 치제문이 전시돼 있다. 스위스와 같은 중립화 방안으로 전쟁 없는 아시아를 고대한 그의 꿈은 114년 지난 오늘날에도 요원한 것인지 선생은 묻고 있다.

김명섭(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단국대 사학과&  webmaster@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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