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홍역은 천연두와 더불어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질환이었다. 반점 모양의 피부 발진과 함께 고열, 기침 증상이 동반되는 홍역은 마진(痲疹)·홍진(紅疹) 등으로 불렸는데, 피부 병변을 묘사한 것이다. 마진은 작은 돌기처럼 피부가 올라온 것이고, 홍진은 빨간 반점이다. 돌기가 아주 큰 것을 ‘두’라고 표현했다.

과거에는 전염병을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했고, 치료 방법 역시 효과적이지 않아 속수무책이었다. 수십만 명이 희생될 정도였다. 홍역 역시 다른 발진성 질환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가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두창과 구별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발진성 질환이 여러 명칭으로 보이다가 1613년 광해군 5년에 “가을과 겨울 사이에 돌림병이 생겼는데, 세속에서는 당홍역(唐紅疫)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처음 보인다. 조선 후기 숙종 33년인 1707년 평안도에서 유행해서 단 보름 만에 1만여 명 이상이, 이듬해 전국에서 수만 명이 사망할 정도로 치명적인 질환이었다. 이후 영·정조 때까지도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발생시킨 치명적인 질병으로 오늘날 매우 어려운 일을 ‘홍역을 치렀다’라는 비유어로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홍역귀가 있었던 것으로 봐서 그 이전에도 질병이 존재했으나 사회적으로 심각한 전염병으로 인식한 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였다. 기존 치료법을 비판하면서 중국, 서양의 선진의학을 받아들인 다산 정약용이 1798년 홍역을 치료한 경험을 기록한 책인 <마과회통>이 있다. 칡이나 감초, 승마 등을 이용해 해열 진통 효과를 기대하는 치료 방법이 제시됐으나, 수많은 환자들에게 비싼 약재를 투여할 수도 없고 효과도 아주 제한적이어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무속신앙에 의지하고 있었다.

서구도 비슷한 상황으로 홍역은 천연두보다 더 무서운 병으로 생각했고, 수많은 어린이들이 희생됐다. 홍역을 다른 발진성 질환과 구별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서야 가능했다. 1757년 스코틀랜드 의사 프랜시스 홈이 홍역 환자의 혈액을 12명의 건강한 사람 피부에 접종하자 10명에서 홍역이 발생했다. 홍역이 병원성 물질에 의한 전염병이라는 것이 명백해진 것이다. 그러나 홍역 바이러스가 분리된 것은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954년이었다. 그 사이 매년 수백만 명이 홍역으로 희생되고 있었다. 1963년 홍역 백신이 소개되었고 예방접종이 시작되자 홍역으로 인한 사망률은 급격하게 줄어 거의 100만명 이상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했다.

우리나라도 1965년 홍역 백신이 수입돼 접종이 시작됐으나 초기에는 가격이 비싸 접종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홍역에 감염됐을 때 치료비용보다 저렴하다는 생각이 확산되면서 백신을 찾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고, 1979년 볼거리, 풍진과 결합된 MMR 백신이 소개되며 1980년부터 국내 접종이 시작됐고 필수접종으로 지정했다. 예방접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홍역은 거의 사라지는 듯 보였으나 2000년에서 2001년에 걸쳐 전국에서 5만5696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이 중 7명이 사망하는 대유행이 있었다. 홍역 1회 접종으로 충분하게 항체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2회 접종으로 바꿨으나 과도기에 2차 접종을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580만 명의 학생들에게 대규모 접종을 실시하면서 2006년 홍역 퇴치에 성공하게 됐다.

2019년 새해 벽두에 홍역 환자가 발견되고 있다. 해외여행 등으로 국내에 유입됐으나 전파력이 강해 주의해야 한다. 특히 MMR 접종이 2회로 바뀐 것은 1997년으로 그 이전에 1회만 한 20~30대의 경우 홍역 항체 형성 유무를 확인하거나 추가 예방접종이 필요하다. 백신에 대한 불안감으로 예방접종을 기피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으며 자신의 건강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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