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싸우자” 대한독립 꿈꿨던 홍재택

홍재택 선생 부부의 일제 말기 사진(고기리 128번지 자택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 사진제공/머내여지도

3·29 머내만세 운동은 고기리와 동천리 주민 400여명이 모인 것을 시작으로 수지면사무소 인근에서는 시위대가 1500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큰 대규모 만세시위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독립운동이 인정된 국가 유공자는 이덕균 선생과 안종각 선생이 유일했다. 홍재택 선생은 이번 수지구청 1층 문서고 범죄인명부 발견으로 독립운동가로서 공적이 확인된 경우다. 홍 선생의 손자 홍봉득(86) 씨는 할머니와 아버지에게들은 얘기를 통해 홍 선생의 당시 이야기를 전했다. 다음은 동천·고기동 역사 연구모임 머내여지도 팀이 직접 홍봉득 씨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다.

기억나는대로 우선 집안 얘기부터 해달라.

큰할아버지(홍재문)는 전통 군관이셨고 할아버지(홍재택)는 나이가 어려서 군관은 아니었다. 큰할아버지와는 15살 차이였다. 당시에는 구식과 신식 군인이 있었는데 큰할아버지는 나라를 지키는 구식 군관이셨다.

홍재택 선생은 3·1운동 소식을 어떻게 들으셨을까.

큰할아버지의 자손들이 서울에 사니 그쪽에서 독립운동 소식을 들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런데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로는 할아버지가 평소에 친구들과 울면서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엔 목숨을 걸고 싸우자’고 하셨다고 한다.

3·1운동 당시 만세시위 준비 과정은 어땠나?

아버지(홍인용)께 듣기로는 밤새 할아버지와 얘기하며 준비하셨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단단히 준비하셨다고 했다. 삼일운동 당시 할아버지는 용인군청 부근에 성을 쌓은 뒤 ‘목숨을 걸고 싸우면 되지 않을까’하며 일을 도모하셨다. 구성, 수지, 낙생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처음에는 600명쯤이다가 1500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머내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처음 상의한 사람이 홍재택 선생과 고기리 안종각 선생인가?

할아버지가 각처 사람들을 찾아 연락하고 몇날 며칠 동안 밤새도록 돌아다니셨다. 안종각 선생은 고기리 손기마을의 대표 역할이었다. 안 선생이 우리 집에서 출타한 할아버지를 밤새 기다린 적이 몇 번 있었단다. 낮에는 할아버지가 연락하러 돌아다니시고 밤에만 집에 오시니 어떻게 연락이 되고 있는지 듣기 위해서다. 듣기로는 28일에 만세운동을 하기로 준비했는데 구성 쪽에서 몇 백 명이 모여 먹을 것이 준비가 안 돼 하루 미뤄 만세시위를 했다고 한다.

홍재택 선생께서 헌병대에서 얼마 동안 어떻게 조사 받았나?

만세시위 다음날 새벽에 집에서 붙들려가셔서 한창 바쁜 모내기철까지 두 달 가까이 잡혀있으셨다. 할아버지가 자백을 안 하니 재판까지 못 보낸 거다. 만세를 부른 것까지는 얘기했지만 그 이전 준비 과정은 매를 맞으면서도 자백하지 않으셨다. 모셔와 보니 엉덩이 살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삼일운동 후 일제 강점기 홍재택 선생은 어떻게 지내셨나?

할아버지는 농사일을 하셨다. 해방 삼 개월 전쯤, 할아버지가 근처의 술집에서 나오시면서 나에게 “너 점심 먹었니”하고 물으실 때 일본 순경이 말채찍으로 할아버지 정수리에서 얼굴을 후려치는 것을 직접 봤다.

할아버지가 눈썹도 깜짝 안하고 맞으시니 순경이 그냥 가버렸다. 할머니께서 만세운동 때문에 할아버지가 특별감시 대상이라고 하셔서 알게 됐다.

해방 후 홍재택 선생은 어떻게 지내셨나?

해방된 후 마당에 멍석을 깔고 할아버지가 춤을 추셨다. 할아버지가 고생한 사람들을 위해 술상을 차려야 한다고 해 집주인인 이민직 씨가 얼마인가 내고 할머니가 빈대떡, 술, 콩나물을 손수 준비하셨다.

<머내여지도 연구자료집2> 인터뷰 전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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