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호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그 장대함에 숨이 턱 막힌다. 마치 높은 산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볼 때의 느낌이다. 자연의 위대함, 넘볼 수 없는 경지를 한 눈에 담을 때의 감동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작품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노라면 이번엔 피식 웃음이 난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호랑이, 짝을 지어 노니는 꽃사슴, 깊은 산 속에 성냥갑마냥 세워진 아파트,  하늘 저 끝을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는 작가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해학적 요소다. 


현대와 전통을 넘나드는 화면 전개는 그의 작가 인생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준호 작가는 일제 강점기 시절 정통 산수화가로 이름을 알렸던 외조부 정술원(1885~1955) 화백의 영향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붓으로 산 그리길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까지 동양화에 전념했다. 그런 이 작가는 대학에서는 의외로 서양화를 전공했다. 유화를 거쳐 아크릴화까지 현대적인 감각을 키웠던 시기다. 그러다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어느 날 우연히 칼로 그림의 배경을 긁어냈는데 그 느낌이 제게 어떤 영감을 줬어요. 손끝의 예민한 감각을 날카로운 칼끝으로 표현해내는 느낌이었죠. 순간 가슴에 뭔가 꽂혔어요. 벌써 20년 전이니 그 세월 동안 칼로 그림을 그려온 셈입니다.”

칼로 그린 인물화, 문자도, 민화를 거쳐 그를 대표하는 산수화까지 처음엔 무뎠던 칼끝의 놀림은 이제 붓의 자유로움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준호 작가의 대표작인 ‘칼로 그리는 산수화’ 시리즈는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재해석해 탄생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전개시키는 ‘금강전도’는 화폭 가득 기개 넘치는 산봉우리들이 일품이다. 이 작가는 정선의 산수화를 황, 청, 백, 적, 흑의 전통 오방색 위에 예리한 칼끝으로 표현해냈다.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새로운 금강전도가 탄생한 것이다.  
이준호 작가의 ‘칼로 그리는 산수화’ 첫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이 소장하고 있다. 대전에서 이 작품을 처음 선보였을 때 지역대학의 동양화 교수가 작품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줄담배를 피웠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이준호의 작품은 지금까지 없었던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이준호 '붉은산' 2015

강렬한 원색의 바탕에 얇은 칼날 하나로 이뤄낸 산수화는 분명 ‘이준호’ 이름 석 자가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기법이다. 수만 번의 칼질은  긴긴 역사를 화폭에 쌓아 올리는 일이다. 4~5m 대작이 완성되기까지 수개월. 작업은 뾰족한 칼날이 무뎌질 정도로 반복된다.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심으로 첩첩이 쌓아 올라가는 선들은 능선과 계곡을 만들고, 겹쳐지고 교차하며 숲을 이룬다. 이준호 작가는 이 작업을 ‘땅 속에 묻힌 유물을 발견한 후 그 위의 흙을 아주 조심스레 걷어내는 작업’과 같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다른 작가들조차 궁금해 하는 그의 기법은 단순하지 않으며 매우 조심스럽고 예민한 그만의 기법이다.  
“예술가는 절대 남이 흉내낼 수 없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이 작가의 은사가 그의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작가는 은사의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이다. 그의 작품이 세상 유일무이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제자의 그런 모습을 에둘러 칭찬한 것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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