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무심코 바라본 창밖 풍경은 왠지 모르게 늘 편안하다. 비를 피하고 있다는 안도감, 규칙적으로 들리는 빗소리가 마음의 안정을 주는 탓일까.

수채화 작가 정덕문의 ‘비 오는 날에’ 시리즈는 그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는 화폭 그대로 창밖 풍경을 보는 듯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처인구 모현면 매산리, 광주 정씨 집성촌에서 자란 정덕문 작가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진 겸재 정선의 후손이다. 정선의 산수화는 당시 밀도 높은 표현력과 아름다운 선, 미묘한 감각의 구성 등을 따라잡을 자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 정덕문 작가의 작품은 다른 수채화에서 볼 수 없는 묵직한 깊이감과 특유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정 작가의 천재적인 면모는 어렸을 때부터 나타났다. 그림을 좋아했고 눈에 띄게 잘 그렸지만 시골에서 자라 따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미술을 전공한 중학교 스승의 사모가 그의 그림을 우연히 보고 “도시로 나가 미술을 전공하면 크게 되겠다”고 말해준 것을 계기로 미술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해 수채화를 다룬지 40년이 넘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한마디가 훗날 손꼽히는 수채화 작가를 만든 셈이다.

수채화는 물에 의한 유기적인 멋이 있다고들 한다. 작가가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물과 만난 물감은 화폭 위에서 살아있는 듯 색을 만들어낸다. 물의 농담, 종이의 질, 터치의 강도 등에 의해 셀 수 없는 다양한 색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수채화다.

“물이 흐르고 마르며 만들어내는 색이 수채화의 매력이에요. 물이 만들어내는 형태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니 모작이 있을 수 없죠. 그 미묘한 차이가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하고요.”

그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마치 수채화가 우연에 의해 완성되는 양 들린다. 하지만 정덕문 작가의 수채화는 그러기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다. 마치 유화를 보는 듯 깊이가 느껴지는 멋은 정 작가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특징이다. 수채화 하면 떠오르는 맑고 투명함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사물을 꿰뚫는 치밀함은 살아 있다.

어떤 유명한 작가는 수채화를 ‘계산으로 시작해서 계산으로 끝난다’고도 했단다. 수채화는 한 번의 붓 터치를 지울 수도 덧입혀 바꿀 수도 없다. 그만큼 치밀하게 계산하고 고민해야 작품 하나가 탄생한다는 의미다. 정덕문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비 오는 날에는’과 ‘눈꽃’은 그가 얼마나 세심하게 작품을 완성해 가는 지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것은 단순히 경험이나 배움으로 터득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정 작가만의 감성과 천성적 예민함이 만들어내는 천재성은 다른 이들이 따라 하기 힘든 그 무엇이다. 특히 ‘비’ 시리즈는 창에 흘러내린 빗물과 바깥 풍경의 조화에 보는 이들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다.

“비나 눈 오는 날 풍경을 좋아해요. 수채화 기법 중 마스킹을 활용해 저만의 기법으로 만들었죠. 남들이 쓰지 않는 재료 연구를 많이 했고요. 수채화가 미술 분야 중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습니다.”

정 작가가 수채화를 통해 표현해내는 감성 중 하나는 ‘향수’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자연으로의 회귀, 내가 태어난 곳 자란 곳에서 묻히고 싶은 인간적인 감성이 그의 작품엔 서려있다. 정 작가는 매년 중국 작가들과의 교류전을 펼치고 있다. 수채화 작가 중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모이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 정 작가는 늘 도전을 받는다고 했다.

“그림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 정도면 됐지’하는 순간 작가의 생명은 다했다고 생각해요. 늘 도전 받고 고민하고 연구해야 하는 고단한 직업이죠. 그래도 그렇게 어렵게 만든 작품을 보고 누군가가 감동하고 공감해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천재성은 1% 영감과 99%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했던가. 그의 작품이 빛나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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