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사는 마을의 이름은 ‘밤듸마을’이다. 마을사람들은 ‘밤뒤’라고도 하고 ‘밤디’라고도 부른다. 다른 말로는 ‘율곡’이다. 밤이 많은 동네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나보다. 힘차게 솟아있는 아홉 봉우리 구봉산 굽이굽이와 그 동쪽 줄기에서 뻗어 나온 석술암산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산자락 어딜 가도 요즘 밤이 지천이다. 올해는 밤이 풍년이다.

따가운 밤송이를 발로 부여잡고 깔 필요도 없다. 잘 익은 알밤들이 여기저기 툭툭 떨어져 있다. 그 밤들을 줍고 있노라면 마치 헨젤과 그레텔처럼 과자집으로 홀려가듯 뭔가에 홀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몰두하게 된다. 옛날 옛적 수렵본능이 남아있어 이미 충분한 양을 주웠는데도 자꾸만 욕심을 부리게 된다. 그만큼 줍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도 엄청 크고 튼실한 밤나무가 있어 밤이 떨어질 때면 쉬는 시간마다 밤 주우러 다닌다고 바쁘다. 아침 일찍 가야 더 많이 주울 수 있다고 늦잠버릇까지 없애주는 기특한 밤이다.

밤나무는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나무이다. 밤나무는 숲에서도, 집 울타리 안에서도 볼 수 있다. 심지어 조상을 모시는 묘지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보통 씨앗에서 싹이 트면 얼마간 씨앗의 양분으로 자라기 때문에 싹에 붙어 있다가 커짐에 따라 씨앗은 점점 작아져 마침내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밤나무 씨앗인 밤은 싹이 트고 줄기와 잎이 자라 뿌리를 길게 뻗어 나무가 되더라도 계속 남아있다고 한다. 양분은 소진되고 자신의 책임은 다했지만 계속 남아 나무의 생장과 더불어 역사를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밤나무는 조상을 상징한다고 한다. 우리 민속신앙에서 조상은 항상 후손을 돌봐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지 않는가. 또한 조상을 기리는 제사나 차례상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밤이다. 밤은 보통 세 쪽이 달린다. 대추, 밤, 배, 감을 ‘조율이시’라 해서 제사상에 올리는 중요한 과일로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씨앗의 개수와 관련이 있다. 대추 한 개의 씨앗은 임금을 상징하고 밤은 삼정승, 배의 여섯 개 씨는 육조, 감의 여덟 개 씨는 팔도관찰사를 의미해 입신양명과 출세를 바라는 소망을 과일에 빗댄 것이다. 또한 밤은 다산과 부귀를 상징해 결혼식 폐백을 할 때 대추와 함께 신부에게 던져줘 받게 하는 풍습이 남아있다.

밤은 생으로 껍질을 깎아 먹기도 하고, 찌거나 구워 먹는다. 씨앗 껍질을 까서 말려놓았다가 콩처럼 밥에 넣어 먹기도 한다. 필자의 어머님은 그것을 ‘밤쌀’이라고 부르신다.
오래 자란 밤나무는 좋은 목재로 쓰인다. 밤나무 목재는 단단하고 방부제 역할을 하는 타닌 성분이 많아 부서지거나 썩지 않고 오래 간다. 방아의 축이나 절구공이처럼 단단한 연장을 만드는 데 쓰고, 위패나 장승을 만드는 데도 쓰고, 예전 철도 침목을 만들 때 사용하기도 했다.
밤은 영양분을 듬뿍 저장하는 맛있는 열매로 야생동물들에게 중요한 먹이가 된다. 밤송이는 바깥 껍질에 억센 가시가 돋고, 속 알맹이는 다시 딱딱한 껍질로 싸여있다. 하나를 까먹는 데에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도록 해 포식자를 귀찮게 해 덜 먹히게 하는 방어전략인 셈이다.

아는 사람은 알듯이 우리나라에는 참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는 없다. 다만 도토리 같은 열매가 달리는 나무들을 묶어 참나무과로 나눴다. 그런데 밤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한다. 도토리가 달리는 떡갈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와 함께 밤나무, 그리고 가시나무 종가시나무 등의 가시나무들이 있다.

우리 식구는 찐밤보다 군밤을 좋아한다. 그래서 작은 후라이팬에 물기 없이 담아 약한 불로 오랫동안 구워주면 숟가락으로 파가며 잘 먹는다. 반드시 약한 불로 해야 한다. 센불로 하면 갑자기 밤 안의 압력이 높아져 ‘펑’ 하고 터지고 만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한다. 이를 막기 위해 껍질에 살짝 상처를 주거나 벗겨내어 굽기도 한다. 밤이 깊어지는 밤의 계절에 구워 먹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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