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압선 철탑이 많기로 치면 빠지지 않을 용인엔 200여 전기공사 업체가 있다. 도시화와 인구급증에 따른 수요가 늘어난 탓이다. 그 가운데 1997년 설립돼 전기·소방·점검 및 보수공사 분야에 걸쳐 용인을 대표하는 기업이 있다. 세광건설(주)이다. 

‘최고의 기술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의 품질’이라는 슬로건 아래 끊임없이 노력해 전기관련 최고 서비스업체로 성장한 이 회사의 CEO는 김종두(63) 대표이사다. 지난 해 한국전기공사협회 경기도회 회장에 당선돼 2800개에 달하는 전기업종 기업들의 권익보호와 공익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그는 일찍부터 인연을 맺은 ‘전기맨’이다. 

“고등학교를 전기과로 입학했어요. 그런데 전기공이 목표는 아니었지요. 운명은 우연한 사고와 인연으로 바뀌었어요.” 1975년, 정읍이 고향인 그는 인근 이리공고를 졸업했을 때만해도 꿈은 유도대(용인대 전신)를 거쳐 경찰이 되는 거였다. 고교 시절 이미 유도 2단의 유단자로 3단이면 경찰 특채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시험을 보러가기 위해 정읍역에 도착했을 때 교통사고가 났다. 다리가 부러져 시험을 치룰 수 없었다. 

인생진로를 가로막는 사고였기에 낙담은 컸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가 왔다. “후일 국무총리를 지낸 진위종(1921∼1995) 당시 한국전기공사(한전) 사장이 고향출신 전기과 졸업생들에게 취업 기회를 열어줬어요.” 한전에 입사한 그는 강원도 춘천에 첫 발령을 받았다. 1977년경이었다. 전봇대에 올라 전기 수선을 하는 수선공이었던 그는 당시를 가장 고생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당시 보수반은 생사를 걸어야 했다. 스스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했다. 당시 사고가 많았는데 전기에 감전되면 죽기 아니면 장애였다. 실제 옆에서 일하던 동료들이 감전사 하거나 큰 사고를 당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전기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엔 손발을 다 자른 경우도 있다. 그가 후일 장애에 대한 관심을 갖고 용인지체장애인협회 후원회장을 오래도록 맡아 그들을 지원한 것도 실은 자신의 삶의 한 순간과 경험으로부터 연유한 것이었다. 

# 유도선수와 경찰관을 꿈꿨던 소년, 전기공이 되다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노무직의 어려움을 체험한 김종두는 노동조합에 관심을 갖고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한국전기공사 서울본부 노조 조직부장이었던 그는 지부장 선거에서 패하는 바람에 좌천성 인사이동으로 경기도 용인과 인연을 맺게 됐다. “수원 지점에 속한 용인은 20여명 정도 직원 밖에 없었어요. 자전거를 타고 고장 수리하러 다니던 시절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나중엔 오토바이를 이용해 현장 수리 서비스 업무를 처리했지만 그의 꿈은 거기에 머물 수 없었다. 월급쟁이 생활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는 업무과정에서 원청과 도급관계에 있는 전기 공사업체와의 시스템 등을 파악한 후 한전에 사표를 던졌다. 당시는 시국이 어수선했던 1987년이었다. 

직장 생활을 정리했지만 집에는 알리질 않았다. “6개월 동안 매일 출근하듯 집을 나섰지요. 받아둔 퇴직금을 쪼개 노란 봉투에 담아 월급 타다 주듯 했으니 걸리진 않았어요. 하하.” 오래갈 순 없었다. 하지만 어쩔 도리도 없었다. 용인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한전 출신이긴 했지만 이미 터를 잡고 전기업계를 호령하던 회사들이 있었다. 후발주자인 만큼 열심히 일하는 수밖엔 없었다. 출혈경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개 한전 공사는 단위가 크고 대금결제가 안정적이어서 선호하지만 문제는 공개 입찰인 관계로 수주까진 쉽지 않지요.” 실제 서울지역 면허를 어렵사리 구해 입찰에 응했지만 번번이 밀렸다. 나중엔 손해를 보면서도 직원들을 놀릴 수 없어 원가에도 못 미치는 금액을 ‘울며겨자먹기식’ 으로 낙찰가를 써 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엄청난 재난이 용인에 닥쳤고 이것이 회사를 살리는 계기로 작용할 줄은 몰랐다. “하루는 외지에 나가 있는데 직원들에게 전화가 왔어요. 집중폭우가 내려 용인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대부분 전봇대가 넘어졌다는 보고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전기사업체였죠.” 당시는 1991년 여름이었다. 이동읍을 중심으로 엄청난 집중호우로 한 마을에서 10여 명의 사망자가 생기는 유래없는 자연재난이 발생했다. 산사태로 고압선이 끊기기도 했다. 남사 창리저수지 제방이 무너져 아랫마을은 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 1991년 여름…사업에서 배운 ‘세옹지마’  
당시 다른 업체들이 일거리가 없다는 이유로 회피했던 이동·남사지역은 마침 당시 김종두 대표가 마지못해 맡고 있는 지역이었다. 한 달 이상 직원들이 총동원돼 복구작업에 매달렸다. 전기 공급이 정상화됐을 때 쯤 회사 사정은 더 많이 좋아질 수 있었다. 무려 60억 규모의 긴급 재해복구 사업이었던 것이다.   

‘화복(禍福)은 동시에 온다’ 했던가. “송전탑 철탑 공사는 고위험군 직종이죠. 다이빙 다음으로 인건비도 비쌉니다. 전문성과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에요. 일은 많았지만 그만큼 위험이 따랐고 우리 회사도 비켜가질 못했어요.” 1991년 대규모 복구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철탑에 올랐던 2명의 직원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충격도 컸고 번 돈의 상당한 액수는 마땅히 보상처리와 유족을 위해 써야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공사 현장을 누볐던 전기공 김종두. 그는 1997년 1월 덕진산업(주), 1999년 세광전기(주)와 세광건설(주)를 설립하고 이어 2001년엔 소방전문시설공사업 등록을 통해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2003년엔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국전기공사 무정전 시공인증도 받았다. 기술직으로 현장에서 실무를 갈고 닦으며 성장해 온 오뚜기 인생답게 김종두 대표이사는 스스로 전기공사시술자 중급 자격증, 전력기술인 중급 감리원, 전력기술인 중급 경력 자격증을 갖추고 모든 일을 선두에서 솔선수범하고 있다.  

# 전기공사협회 도회장으로서의 새로운 길 
세광건설(주)은 한 때 공동주택 사업에서도 대박을 만들어냈다. 사업장으로 확보한 화성 동탄 부지가 갑자기 신도시 발표에 바람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부지를 매수하겠다고 나섰지만 거절했다.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부지를 바탕으로 공동주택사업에 나섰다. 시행사와 유명 우수 건설시공회사와 협약을 하고 진행한 건설사업은 100% 분양되는 쾌거를 거뒀다. 이를 통해 또 한 번의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누가 뭐라해도 전기사업이 본업이죠. 거기서 잔뼈가 굵었으니까요. 요즘은 전기사업을 하는 공종업계의 발전방향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국가와 지역사회에 공익적으로 기여할 방도를 찾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그는 지역에서 발주하는 중소규모 사업은 대부분 양보하고 경기도 한국전기공사협회 경기도회 회장으로서 더 큰 일에 몰두하고 있다. 중앙회 이사와 한국전기신문사 이사 단장 등을 역임하며 그간 쌓은 역량과 경륜을 나누고 있다. 전기공에서 출발해 한 회사를 중견기업으로 일구고 지금은 지역사회와 업종을 대표해 공익활동에 매진하는 김종두 대표이사. 그를 통해 도전하는 기업인의 희망을 읽는다. 
 

김종두의 인생노하우

첫째,  좌절하지 마라 
“내 인생은 10대부터 꼬였다. 유도 유단자였던 나는 경찰 특채를 꿈꿨다. 유도대학 진학을 위한 서울로 가는 그날 교통사고로 운명을 바꿔야했다. 낙담도 했지만 극복하고 일어나 새 길을 열 수 있었다. 현실을 긍정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 길은 열린다는 걸 60년 인생을 통해 깨달았다.”  

둘째,  용기있게 결단하라
“주어진 길만 가선 성공에 이르기 어렵다. 도전과 결단이 필요하다. 힘들긴 하지만 한국전력공사는 안정된 직장이었다. 아내도 회사원을 원했다. 난 꿈이 있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용기를 냈고 결단했다. 지금에 이른 결정적 계기는 바로 그 순간의 결단이었다.”

셋째,  더 넓은 눈으로 세상을 보라
“머무르면 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더 높이 나르지 않으면 넓은 세상을 볼 수 없다. 개인의 성취와 성공에 이르면 다음 단계는 공익의 관점에서 더 넓은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다. 전기공사협회 경기도회장을 맡아 일을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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