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에 11세기말부터 13세기까지 십자군전쟁이 있었다. 성지탈환을 둘러싸고 기독교세력과 이슬람세력이 오랜 세월 동안 맞붙은 것이다. 총 8차례 십자군전쟁이 벌어졌는데, 그중에서 제4차 십자군전쟁은 특이했다. 십자군이 이슬람 국가가 아닌 같은 기독교국인 비잔틴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점령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후세의 역사가들은 성지회복이라는 본래 목적을 잊고 경제적 이익을 위해 싸운 최악의 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 마디로 본말이 전도된 대표적인 사례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현재 국민연금제도 개선을 둘러싼 논의가 한창이다. 최근에 발표된 제4차 국민연금 재정계산 결과 국민연금기금이 지난 3차 추계보다 3년이 앞당겨진 2057년경에 소진된다고 한다. 기금이 소진되면 연금을 못 받거나 연금이 줄어들 것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일부 국민들은 ‘국민연금 폐지’까지 요구하고 있다. 언론에서는 기금 소진을 막고 재정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더 내고 덜 받는’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재정계산 결과에 대한 우려와 불만을 나타내건, 대안을 제시하건 간에 국민연금 제도개선은 국민연금 재정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그것이 국민연금 제도 개선의 올바른 방향일까? 자칫 제4차 십자군 전쟁과 같이 본말이 바뀌어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다.
국민연금은 1988년 제도가 도입된 지 30년, 1999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확대한 지 2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두 차례나 연금개혁이 진행됐다. 첫 번째는 1997년 IMF 구제금융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1998년에 이뤄졌고, 두 번째는 국민연금기금이 2047년에 소진된다는 제1차 재정계산(2003년) 결과를 바탕으로 국회에서의 오랜 논의를 거쳐 2007년에 진행됐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 급여수준(소득대체율 : 생애평균소득 대비 연금액)’이 70%에서 60%, 다시 40%까지 낮아지게 됐다.

제도 초기부터 재정안정화 노력으로 현재 국민연금기금 재정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건전한 상황이다. 연금의 역사가 오래된 선진국들은 대부분 부과방식으로 운영해 적립기금이 없거나 5년 이내의 기금만 적립하고 있다. 반면, 국민연금기금은 작년 말 기준으로 621조 원이 적립돼 있는데, 이는 올해 연금수급자에게 30년 동안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이다. 기금이 2057년에 소진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2056년까지 현재의 보험료 수준(9%)를 유지해도 기금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장기적인 인구구조 변화에 대비하고 미래세대의 부담을 완화할 수 있도록 국민연금의 장기 재정안정성을 높이는 것은 중요하나, 이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현재 우리사회 노후 빈곤문제는 심각하다. 알다시피 한국은 수년째 OECD 국가 중에서 압도적으로 노인빈곤률 1위를 지키고 있다. 빈곤 노인들의 다수는 애초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못했거나 가입기간이 짧은 것이 주요 원인이다. 문제는 앞으로 국민연금이 성숙해도 노인빈곤률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3차 재정추계에서도 장기적으로 실제 지급받는 국민연금액이 충분치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간의 연금개혁으로 국민연금 급여수준이 낮아졌고, 고용과 소득이 불안정해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20년 내외로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현재 젊은 세대들도 20년 후, 30년 후에는 현재의 노인세대와 마찬가지로 빈곤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이를 감안할 때,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소득 보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선될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을 도입한 목적은 국민의 노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기금은 이러한 국민의 노후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따라서 국민연금 급여수준을 더 이상 낮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입직연령은 늦어지는 대신 명예퇴직 등 주된 직장에서의 퇴직연령은 빨라지고 있는 고용시장의 변화가 고려돼야 한다. 아울러 출산, 군복무에 따른 국민연금 가입기간 인정범위를 확대하고, 저소득 근로자, 영세 자영자에 대한 보험료 지원을 확대해 실질적인 국민연금 급여수준이 높아질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보험료 부담이 일부 늘어날 수 있으나 국민연금 급여를 높이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다행히 최근 대통령도 “국민연금 개편은 노후 소득보장 확대라는 기본원칙 속에서 논의되고, 국민의 동의와 사회적 합의 없는 정부의 일방적인 개편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아무쪼록 앞으로 있을 사회적 논의에서 국민연금의 목적에 맞게 기금 소진보다 국민연금의 노후소득보장 강화라는 관점에서 다양한 제도개선 방안이 모색되고,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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