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가 고향인 필자는 몇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말 그대로 태생적인 것들이다. 쌀은 살로, 음악은 엄악, 늪은 넢 등으로 발음한다. 한계를 인지한 것도 고향을 떠나 경기도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다. 동향 간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언어표현이 다른 타지에서는 제법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다.

회사에서 10분 넘도록 말하면 동료들은 대화 주제와 상관없이 7~8할은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항변해왔다. 그나마 이해 가능한 것도 “음~~ 그게~~” 등등이란다. 어느 날은 이런 적도 있다. 분식집에서 주문한 음식을 “사주냐”고 묻자 주인은 “처음 보는데 뭘 사주냐”고 반문했다. 포장해주냐를 의미하는 ‘싸다’를 말하고자 한 의도와 무관하게 대신 지불하겠냐는 ‘사다’로 전달된 것이다. 아내와 결혼 초. 슈퍼에 팔던 김밥을 먹고 싶다는 그녀에게 다음에 집에서 직접 만들어주겠다는 의미로 “내가 사줄게”라고 말하니 판매대가서 고른다고 서 있었던 적도 있다. 역시 김밥을 구매해 준다고 이해한 것이다. 

경기도 생활 1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교정이 힘든 발음이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으라 했나. 발음이 되지 않은 몇 몇은 유사어로 대처 했다. 쌀은 벼, 음악은 노래 등등으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일상에서 필자의 발음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듯 했다. 딸이 본격적으로 말하기 전까진 말이다. 거리가 멀어 평소 자주 만나지 못하는 할머니와 영상 통화를 이용하는 딸이 어느 날 고백을 해왔다. 통화가 싫단다. 그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아도 알 듯 했다. 경상도에서 한 평생을 보내고 있는 칠순 노파의 말투는 7살 소녀에게는 외국어에 버금갈 수준으로 느껴졌을 것이랴.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딸은 할머니의 물음에 답해야 하는 순간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알아듣질 못하니 언제 답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딸과 할머니 간 소통문제로만 알았다. 아빠와 대화는 순조로웠다. 간혹 딸이 경상도 방언-꾸룽내(구린내), 배미(뱀), 밥 문나(밥 먹었니)등-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고향이 용인인 고만고만한 아이와 별 다를 게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입학에 대비해 어린이집에서 받아쓰기 등급표를 가져왔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이 등급별로 적혀 있는 종이 몇 장이다. 한쪽에 예습을 당부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한번 예습해봤다. 평소 받침이 많은 몇 몇 단어를 제외하고는 곧잘 쓰기에 자신감을 보여 내심 걱정은 없었다. 

“아빠가 불러주는 거 그대로 쓰기만 해. 그럼 되는 거야”
받아쓰기가 시작됐다. 1번 기역 2번 니은 3번 디귿 4번 리을~~ 한글 자음과 모음이 문제의 전부였다. 의외였다. 딸은 몇 번이고 어떻게 써야 되는지 물어왔다. 단어가 어렵나 싶어 나름 더 또박 또박 불러줬다. 5번 미음 6번 비읍. 지우개로 몇 번을 고치더니 난감한 표정을 이었다. 소심하게 가린 손바닥 뒤로 공책이 보였다. 수차례 지워 시커멓게 때가 묻은 한 곳에 딸이 적은 큼지막한 글자가 보였다. 

‘기역’ ‘니은’ ‘디귿’ 무난히 받아 적은 단어 바로 옆에 낯선 단어가 보였다. ‘리얼’, 헉 정말 실제 상황이다. ‘미엄’, ‘비업’. 뒤이어 나온 단어 모두 한결 같다. 딸은 아빠가 불러준 그대로 적은 것이다. ‘으’와 ‘어’ 발음이 부정확한 아빠가 문제를 냈으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차근차근 설명 하니 딸이 버럭 화를 낸다. “그건 ‘어’가 아니라 ‘으’라고 해야 되는 거야”. 딸은 자기 스스로가 모르는 것이 아님을 주장했다. 솔직히 그 순간에도 필자는 ‘어’와 ‘으’간 발음 차이가 구분되지 않았다. 모든 한계를 인정하고,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날 저녁, 딸은 모음과 자음을 다 적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받았고, 아내는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있음을 과시했다. 아빠는 소통에 심각한 한계가 있는 아저씨로 낙인찍혔다.   
딸! 근데 말이야. 아빠가 정말 잘 하는 게 있어. 중학교 땐 반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어. 
따라 해봐 ‘내가 기린 기린 그림은 잘 기린 기린 그림이고, 니가 기린 기린 그림은 잘 못 기린 기린 그림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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