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규모 스티로폼 재생처리기업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스티로폼은 대개 일회용품이다. 한번 쓰면 버린다. 부피가 커 처리도 고민이고 그러다보니 환경오염의 주범이란 소릴 듣는다. 이처럼 가정과 산업현장, 시장 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연간 약 4만여 톤의 폐스티로폼은 어디로 가는 걸까. 다행히 재활용률은 약 70%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전국 최대 규모인 30%를 재가공 처리해 세계 각지로 수출하고 내수시장에도 판매하는 회사가 용인에 있다. 바로 처인구 이동읍 서리에 위치한 진성테크 주식회사다. 
“일반 제조 공장과는 다르죠? 발 디딜 틈도 없어요. 중국발 재활용쓰레기 대란 때문에 물건을 전부 우리 회사로 가져오니 참 고민입니다.” 처음 회사를 찾았던 지난 3월은 공교롭게도 국내 재활용 제품 처리문제로 나라가 온통 시끄러울 때였다. 

구릿빛 얼굴에 다부진 체격의 이 회사 CEO, 김윤영(59) 대표이사는 대형 화물 트럭에 실려 연이어 들어오는 스티로폼 반제품을 현장에서 처리하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쓰레기 같죠? 다 돈이여. 하하.” 오늘날 스티로폼 재생처리기업 가운데 국내 최대 규모로 성장한 진성테크(주) 김윤영 대표이사. 그는 어떻게 현재 업종을 선택해 중국‧남아공‧태국‧캐나다 등에 수출까지 하며 성공가도를 달려왔을까.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참 좋은 인연 때문이죠. 본래 내 직업은 운전기사였어요. 얘기가 좀 깁니다.” 

#고속버스 기사를 꿈꿨던 소년, 그 꿈을 이루다
1959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그의 집은 가난했다. 외지로 일거리를 찾아다니며 5남 2녀의 자식들을 건사했던 아버지는 어느 해 평택에 자리를 잡고 가족들을 불렀다. 김 대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방학 때면 버스를 타고 친척들이 있는 고향을 찾았다. 그 당시 소년 김윤영에겐 많은 손님을 태우고 안전하게 큰 차를 운전하는 ‘하얀장갑’의 버스기사가 너무나 멋져 보였다. 그 때부터  장래 꿈은 버스기사가 됐다. 

가난 탓에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17일 만에 서정리역에서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방아 찧은 곡식을 몰래 싸전에 팔아 마련한 단돈 1000원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목적지도 없었다. 그저 운전을 배우고 싶었을 뿐이었다. 우르르  승객들이 많이 내렸다. 무작정 따라가 보니 영등포역이었다. 버스를 갈아타고 가다가 차창 밖에 화물 주차장을 보면 내렸다. 나이 어린 소년에게 일자리를 주는 곳은 없었다. 가까스로 8톤 화물트럭 ‘조수’가 됐다. 트럭에서 먹고 자는 생활이었지만 운전기사의 꿈에는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1980년. 어느덧 세월이 흘러 15톤 덤프트럭 운전직을 구해 강원도 횡성에서 일을 하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당시 오일쇼크로 나라는 어려웠지만 중동 붐이 일어 건설회사 중동 진출이 많을 때였다. 한 달 급여가 14만원 정도였던 시절, 해외로 가면 3~4배 정도 더 받을 수 있었다. 아내와 살림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 해외근로자로 진출해 1년 6개월을 뜨거운 모래바람과 싸웠다. 

“귀국해서 보니 자식도 태어났고 전세 350만원 짜리 집이 생겼더라구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죠.” 소박한 꿈을 이룬 그는 버스회사에서 9년간 근무하던 중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어린 시절부터 소망했던 고속버스 기사가 되었다. 두 번째 꿈마저 이루는 순간이었다. 2년 여 전국노선을 행복한 마음으로 돌고 있을 무렵인 1994년 어느 날이었다. 그를 애타게 찾는 전화가 왔다. 새로운 기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새로운 길, 창업…우연히 찾아온 기회
“삼성전자에 다니는 친구였어요. 사업제안이었죠. 고속버스 기사로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기에 몇날 며칠을 고민했죠. 그러다 결심했습니다. 그래! 운전기사는 다시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업은 언제 기회가 다시 오겠는가.”
당시 일회용품 소비가 늘면서 처리방식과 비용은 골칫거리였다. 정부에서 찾아낸 방법은 ‘생산자책임 재활용제도’였다. 이는 제품을 사거나 포장재를 이용한 생산자에게 폐기물의 일정량에 대한 재활용 의무를 부과하는 거였다. 삼성처럼 대기업은 엄청난 포장재 스티로폼을 사용했고 그 처리를 맡기는 사업이었다. 

1994년 3월 23일 사표를 던졌다. 3년 2개월 만이었다. 처인구 모현읍 갈담리에 작은 공장을 차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스티로폼 재활용 기업의 탄생이었다. 물품은 전국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부부는 밤낮구분도 없이 일을 했다. 드럼통을 개조해 열풍기로 스티로폼을 녹여 압축하는 다소 원시적인(?) 방법이었지만 꽤나 짭짤한 수익이 됐다. 처리하는 업체에서도 비용을 지불했고 재가공해 판매수익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8년 IMF로 상징되는 외환위기가 왔을 때 위기는 있었다. 동종업계가 생기면서 경쟁을 해야 했고 단가 하락이 이어졌다. “단가 하락은 물론 나중엔 물건을 직접 가지고 가라 할 정도가 됐죠.”  

힘든 과정을 넘기자 다시 성장일로를 걸었다. 각종 환경규제로 더 이상 한강 상수원 수계인 모현에선 사업을 할 수 없었던 김윤영 대표는 2001년, 이동읍 서리에 새로운 공장 터를 마련했다. 동시에 법인으로 전환하고 삼성전자 협력사로 당당히 등록을 마쳤다. 2008년 또 다시 국제경제 위기로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이미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기술력으로 경쟁력을 갖추었던 터라 극복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힘은 바로 직원들이었다. “외국인 근로자를 포함해 근무 경력 10년 미만이 거의 없어요. 공장장은 25년째 같이 일합니다. 인복이 많은 덕이라고 생각하고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요. 버는 만큼 나눠주겠다는 것이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 국내 1위를 너머 세계로 뻗어가는 수출기업
진성테크(주)에서 처리하는 스티로폼은 한 달 기준 1500톤에 달한다. 전국 65곳의 지자체에서 수거되는 물량은 전체 30%에 해당한다. 각 관공서 재활용센터를 통해 들어오는 폐스티로폼은 파쇄와 압축과정을 거쳐 새로운 상품으로 재탄생한다. 각종 인테리어 몰딩, 사진액자 프레임, 합성목재 및 내장판재, 욕실 장, 욕실발판과 조립식 발판 등 다양한 건축자재로 쓰인다. 

2018년 초부터 중국이 재활용쓰레기 수입을 중단하면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적이 있고 환경규제가 강화되고 있지만 진성테크(주)에서 만들어진 반제품은 그 안정성과 품질을 인정받아 계속 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2013년, 50회 무역의 날 김윤영 대표는 500만불 수출탑을 달성했다. 앞으로 목표는 1000만불 탑을 거머쥐는 것이다. 쓰레기를 돈으로 만들고, 수출 효자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미다스의 손’ 진성테크(주) 김윤영 대표이사의 두 어깨가 더욱 든든하고 자랑스럽다.

김윤영 대표이사의 성공노하우

기회를 놓치지 마라.

“어린 시절 꿈이었던 ‘고속버스 기사’가 되어서 나름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사업이라는 새로운 도전은 두려움이었고 불투명한 거였다. 하지만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지난 온 길은 다시 갈 수 있었지만, 잡지 않으면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경영목표와 가치를 분명히 하라. 

“수익창출은 기업의 목표다. 수출 1000만불 탑을 달성하는 것이 앞에 놓인 실현가능한 목표다. 기업인은 가치를 동시에 추구한다. 우리는 환경을 생각하는 1등 기업을 지향한다. 지구를 오염시키고 환경을 더럽히는 폐 쓰레기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자부심으로 일한다.”  


직원들이 행복하라. 

“기업은 항상 위기를 통과의례로 여긴다. 리스크 관리는 경영의 ABC다. 여유자금을 쟁여놓는 것이 만사가 아니다. 중소기업으로선 불가능하기도 하다. 방법은 직원들이 행복한 기업이다. 고객의 신뢰와 함께 직원들이 행복하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기업의 저력과 원천은 바로 구성원들이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라. 

“나에겐 기회도 많았다. 되돌아보면 그 기회는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믿음이 바탕이 됐고 성실함이 배경이 되었다. ‘열사의 나라’ 사우디에서 일을 할 때, 한 번 운전대를 잡으면 19시간 20분을 가야했지만 견뎌내니 더 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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