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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과 국민부담, 느린 것이 가장 빠를 수 있다
  • 이동훈(서울새로운내과 원장, 조지메이슨대 초빙 교수
  • 승인 2018.05.25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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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한국은 극심한 혼란과 전쟁이 발생하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집을 짓고 공장을 만들어 산업을 재건하고, 젊은이들은 낮에 일하며 밤에 공부하는 노력 끝에 오늘날 세계 중심국가 중 하나가 됐다. 국민 소득 증가와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고 국가의 중요 정책 중 하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수십 년에서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만들어진 선진국의 건강보험제도에 비해 한국의 건강보험제도는 급조된 측면이 있었다.

구휼과 시혜의 의미였던 의료제도가 현대적 의료보험으로 시작된 것은 1970년대였다. 1970년대 경제 발전과 급격한 사회 변화는 물가를 급등시켰고, 오일쇼크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물가 가운데 하나가 의료비였다. 의료비 가격 자체가 비싸다는 것보다는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에 불과했기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됐던 것이다. 실제 1970년대 위내시경 비용은 현재 가치로 환산했을 때 약 30만원 정도였다.

1970년대 공산주의와 체제 경쟁을 벌이고 있던 박정희 정부는 무상의료를 실시하는 북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정부는 낮은 국민 소득을 고려해 보험료를 아주 낮게 책정하고 보험 혜택 역시 꼭 필요한 부분만 보장하는 소위 ‘저부담 저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의료보험을 1977년에 실시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적 상황은 저부담 저보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의료비를 55%로 강제 인하시켰는데, 현재까지도 의료계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저수가’ 정책이다. 절반 가까이 낮춰진 의료비로 병원은 진료할수록 손해볼 수밖에 없었고, 보험 적용되지 않는 진료의 이익으로 상쇄시켜야 했다. 그 결과 비보험 진료가 발달했고 보험 진료를 해야 하는 생명에 필수적인 전문 과목들은 발전에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가 시작한 의료보험은 불과 10년 만인 1989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이 확대됐다. 가까운 일본은 36년(1922~1958), 독일의 경우에는 무려 100여년(1883~1988)이 걸린 것과 비교하면 급속한 확대라고 볼 수 있다. 보험 대상의 급격한 확대는 의료보험공단에 재정 부담을 가져왔고, IMF 경제 위기를 맞이하자 큰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김대중 정부는 의약품 오남용을 줄여서 의료비용을 줄이겠다는 의약분업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의료비가 급증하는 부작용으로 2001년 건강보험 재정 위기를 맞이했다. 의약분업의 장밋빛 효과만을 강조한 나머지 진료량이 급증하면서 발생하는 재정 증가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2000년 의약분업은 전면적이며 강제적으로 순식간에 실시했는데, 의료기관이 환자에게 필요한 약품을 직접 투약하던 동양권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급격한 추진이었다. 일본은 1873년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의약분업을 시작해 100년이 넘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의료기관에서 약을 구입할 수 있고 약국을 이용할 경우 좀 더 저렴하게 해 처방전 발행을 유도하고 있다.

2000년 이후 저부담 저보장에서 ‘적정부담 적정보장’으로 정책적 전환이 추진됐고 선거 때마다 더 많은 의료보장을 약속하고 재정은 뒤따르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국민의 높아진 기대에 부족한 재원은 의료시스템 곳곳에 과부하를 줘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2015년 메르스 사태의 감염 위기는 2018년 신생아실 사망사건까지 지속되고 있다. 안전한 의료환경과 국민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정책 추진은 국민 부담을 줄이기 위해 6인실을 늘리라는 지시와 감염 관리를 위해 다인실을 감축하라는 명령이 동시에 내려오기도 한다. 최근에도 보장성 확대 정책으로 다인실을 늘리라는 정책 추진과 함께 감염 관리를 위해 병상 간격을 1m 이상 유지하라는 행정명령에 병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고 있다.

의료정책이 좌충우돌하고 선거 때마다 장밋빛 공약을 남발하면서 우왕좌왕 하는 이유는 빠른 성과를 내려는 조급함 때문이다. 의료계뿐 아니라 교육계도 매년 바뀌는 정책으로 학생과 학부모들이 힘들어 하고 있다. 100년은커녕 십년도 가지 못하는 정책은 분명 문제가 있다.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기 전에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핵심적인 재원 마련, 지속 가능성, 부작용 등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시범사업을 걸쳐서 서서히 추진하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한다. 추진에 5년, 10년이 걸린다 하더라도 충분한 협의 기간을 가진다면 각종 사회적 갈등으로 발생하는 부작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느린 것이 빠른 것일 수 있다.

이동훈(서울새로운내과 원장, 조지메이슨대 초빙 교수  webmaster@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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