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는 주변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들은 말이 있다. ‘미운 일곱 살’이다. 그렇게 예쁜 행동만 골라 하던 아이가 일곱 살이 되면 에누리 없이 말썽꾼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발 더 나가 ‘버리고 싶은 일곱 살’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물론 그런 마음은 아니겠지만 속상함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딸이 어린이집 나이 기준으로 7살이 됐다. 그리고 4달여가 지났다. 뭐 생물학적으로는 아직 6살이니 미운 7살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예상은 봄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면서 깨졌다.

집에서는 전혀 사용하지도 않는 말을 어디서 배웠는지 아주 적재적소에 터뜨린다. 하지 말라는 소리를 5번 이상해야 그제야 알겠노라 대답한다. 그리고 수차례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간절한 목소리가 이어져야 행동을 멈춘다.

흔히 말하는 ‘뺀질한’ 행동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화 중 뭔가 재밌는 혹은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 나오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하지 말라’는 말에 ‘싫다’란 말로 대꾸하는 고집이 벽창호의 기운을 넘어 설 기세다.

딸과 티격 대는 일상이 반복되니 기운이 빠진다. 뭔가 말을 해도 듣지 않고, 졸졸 따라다니며 집 안을 어지르는 모습이 그저 예뻐 보이지만 않는다. 참다 참다 목소리가 높아진다. 두 눈을 끔뻑끔뻑하며 긴장하는 딸을 보면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이번만은 안 되겠다 싶어 더 강하게 혼낸다.

근데 이상하다. 혼을 내는 강도가 강할수록 딸은 면역성을 키우는 것 같다. 처음에는 두려워하던 자세가 ‘하는 척’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면전에서 장난까지 친다.
언제이던가. 밥을 먹다 밥풀을 많이 흘린다고 혼내면 머리를 숙여 ‘예예’ 그러면서 발로는 흘린 밥풀을 문지르고 있다. 어떨 때는 혼나는 딸이 노래를 웅얼웅얼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더 심할 때는 이야기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냥 자기 할 일 하러 가버리기도 했다.

황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나마 사람이란 게 궁하면 통한다고, 그런 아이의 7살 객기에 점점 적응이 된다. 오히려 예전에 미처 보지 못한 딸의 모습을 보는 계기가 된다. 제 아무리 부모가 혼을 내도 우직하게 지 할 일을 계속하는 것을 보고서야 아이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는지 알았다. 그냥 화만 내면 말을 잘 들을 것이라는 생각에 큰 소리만 냈지 그것이 얼마나 효능이 없는지도 알았다. 무엇보다 딸이 하는 행동이 예전보다 많이 어른 아니 어린이스러워졌다는 것이 눈에 쏙 들어왔다.

딸과 둘이 외출해 가장 당황스러울 때는 화장실을 가겠다는 신호를 보내올 때다. 작은 볼일 정도야 충분히 혼자 할 수 있지만 큰일은 아직 부족함이 있다. 때문에 엄마가 곁에서 조금 도와주곤 했는데, 이제는 남자 화장실은 가지 않겠다고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문 밖에서 목소리로 도움을 준다. “화장지 있지? 그걸로…”

볼일을 무사히 마치고 나온 딸에게 “아빠랑 화장실 가는 게 창피해?”라고 물으니 대답은 단호했다. 창피하단다. 그것도 자기 나름 꽤 오래전부터. 똥 기저귀 갈아줬던 아무것도 모르던 딸을 잡아먹은 일곱 살 된 녀석이 제법 큼지막한 모습으로 변해 내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미운 짓을 하는 일곱 살 된 딸. 어릴 적 막 뛰놀던 말초적인 감정과 점점 세상 물정을 알아가는 이성이 서로 충돌하니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그 혼란을 미운 짓으로 표현되고 있을 것이다. 딸도 그렇게 말한다.
“아빠! 나도 그렇게 안하고 싶은데 계속 그렇게 된다 말이야”
딸. 그래 좋아. 미운 일곱 살 재밌게 잘 보내고 있어. 근데 말이야, 중 2병은 어떻게 버텨나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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