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풀렸다 생각하고 점퍼 하나에 봄 바지를 입었더니 산행하는 내내 찬바람에 몸을 떨었다. 보온병의 따뜻한 차 한 잔이 참 고마운 순간이다. 
아직 나무에는 잎이 나지 않았다. 잎보다 먼저 피는 매화, 벚꽃이 한창인데, 숲에서 혼자 여름인양 초록색 넓은 잎을 달고 있는 나무가 있다. 너무 생뚱맞아 보이는 이 나무는 이름도 생소한 ‘귀룽나무’이다. 나무고 풀이고 다 같이 한날에 싹을 틔우는 것이 아니란 것은 알겠지만 이렇게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이는 나무는 흔치 않다. 키가 커서 햇빛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 봄의 햇빛이 아까워서 인지 남보다 일찍 광합성을 시작했다. 큰 귀룽나무 주변에 아기 나무들이 많이 있다. 

이런 아기 나무들은 빨리 잎을 내는 것이 생장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그늘이 깊은 숲, 오래된 숲은 점점 안정화해 간다. 크게 변하지 않는 숲에서, 대를 이어 갈 어린 나무들이 계속 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자손을 키워내지 못하면 그 숲은 다른 숲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숲이 변하는 것이 좋지만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언제나 변하면서 안정되고, 안정 중에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숲을 만드는 여러 생물들이 다양하면 안정과 변화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 관계의 한 부분을 귀룽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귀룽나무 이름은 ‘구룡목(九龍木)’이라는 한약명에서 온 것이라 추측한다. 키가 크고 굵게 자라는 줄기의 모습이 아홉 마리 용을 보는 것 같아 지은 이름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나름 나무에 걸맞은 이름이다. 귀룽나무 아래에서 구룡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봄 단풍든 귀룽나무의 연한 초록빛 늘어진 가지가 살랑인다. 벚꽃이 질 무렵 아까시나무 꽃 같은 풍성한 하얀 꽃이 핀다. 벚꽃 색깔이 핑크빛 도는 러블리한 흰색이라면 귀룽나무 꽃은 연둣빛이 도는 상큼한 흰색이다. 체리 모양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 버찌가 달리는 벚나무 친척임을 바로 떠올릴 수 있다. 잎 모양도 벚나무와 비슷하다. 가장자리가 톱니처럼 생기고 아이 손바닥 정도 크기이며 잎자루에 꿀샘이 있다. 하지만 잎자루가 붉고 꽃차례가 다른 것이 벚나무와의 차이다. 평소에 꽃가게에서 파는 한 송이 커다란 꽃모양에 익숙해져 나도 모르게 꽃은 한 송이씩 피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꽃 한 송이의 모양도 참 다양하지만 꽃차례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래서 꽃차례(꽃이 달리는 모양)도 식물을 구별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꽃이 한 송이씩인지 여러 송이가 무리로 피는 지를 우선 구분하고, 여러 송이가 핀다면 길게 늘어지는지, 꽃다발처럼 모여 피는지 구분해보면 꽃을 보는 눈이 더 넓어진다. 아이가 요즘 한창인 진달래꽃과 개나리꽃을 그렸다. 필자가 그 옆에 앞으로 필 아까시나무 꽃을 그려줬더니 완전히 다른 꽃차례를 보고 자기도 한번 그려본다. 진분홍색, 진노랑색 꽃보다 눈에 띄지 않는 아이보리색이지만 화려한 꽃차례가 아이의 마음을 움직였나 보다. 하나씩 피는 빨강색 해당화보다 다발로 피는 찔레가 더 화려하고, 주황색의 큰 능소화보다 연보라빛 등나무의 꽃다발이 더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꽃차례의 매력이다. 지금부터 한 달 동안 숲을 산책할 때 화사하게 꽃이 핀 귀룽나무 모습을 볼 수 있다. 새로운 이름의 나무를 알고 그것을 숲에서 확인하는 희열을 맛보시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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