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농촌지역인 처인구 백암 근창리에 덩치 큰 공장이 우뚝 서 있다. 널리 알려진 회사지만 대개 이곳이 우리나라 산업용 섬유업계의 신화를 써 가는 현장이란 것까진 잘 모른다.  

국내 최초로 지퍼용 모노사와 산업용 P.P섬유를 개발해 해외 50여 개국 이상에 수출 하고 있는 원사 전문 제조업체, 세계 38개국에 독자 상표등록 후 자체 브랜드로 수출해 외화 획득에 앞장서고 있는 회사, 수출기업으로서 대통령 표창과 은탑산업훈장을 받으며 한국P.P섬유공업을 대표하는 기업, 그 외에도 많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이 회사가 바로 45년 역사를 가진 동선합섬(주)이다.

산업화 초기, 섬유산업은 우리나라 수출과 일자리 창출에 일등공신이었다. 지금은 임금 경쟁력 등의 이유로 대부분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해외로 공장을 옮겨 생산하고 있는 처지다. 하지만 동산합섬 만큼은 꿋꿋하게 국내 생산을 고집하고 있다. 그 중심에 바로 CEO 서석홍(75) 대표이사‧회장이 있다. “왜 국내 생산을 고집하냐고요? 한 마디로 뿌리산업의 중요성 때문이죠.” 서 회장의 설명은 이어진다. “현실적으로 문 닫거나 옮기거나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업종간 유기적인 협력은 국가산업 경쟁력의 필수조건이에요. 한 예로 한국에서 봉재산업이 생산기반을 해외로 옮기면서 발 빠른 대처능력이 떨어지고 다른 업종까지 여파가 미쳤어요. 섬유산업도 마찬가지죠.”

국내 2만여 섬유업체는 지금 많이 어렵다. 서석홍 회장이 이끄는 동선합섬도 4차 산업혁명이란 도도한 물결 속에 최첨단 스마트 공장으로의 변신과 해외 생산기지 확보 등 능동적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뿌리산업의 중요성을 생각해 국내 생산라인 폐쇄와 같은 선택에는 부정적이다. “‘경제보국’이란 애국심과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기업인의 책임이며, 중단 없이 앞으로 내달려야 하는 것이 기업인의 운명이죠.”

# 우직하게 뿌리산업을 지키려는 이유 
뚝심과 애국심, 무서운 집중력과 돌파력으로 여전히 섬유업계의 신화를 만들어가는 서석홍 회장.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듣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음은 짠해진다. 대구에서 100여 리 떨어진 경북 고령군 쌍림면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선친을 여의었다. 어린 시절부터 농사일은 그의 몫이었다. 워낙 성실하고 영특했던지라 초등과정 6년 간 개근과 우등을 했지만 형편상 명문 경북중을 포기해야 했다. 대신 30여 리를 걸어 보령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그의 꿈은 대구사범 진학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 멀었다. 기술을 배워야한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대구에서 양복점, 서울 약방 등을 전전했다. 희망과는 다른 길이었다. 

소년 서석홍이 노동현장에서 땀 흘리고 있을 때 친구들은 가방 들고 학교에 갔다. 서석홍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견딜 수 없었다. 과감하게 일을 내려놓고 대구에 있는 신설 고등학교 야간부에 2학년으로 편입했다. 실로 오랜만에 잡아 본 책, 낮선 교복이었지만 불과 2개월 만에 그는 유명학생이 됐다. 뛰어난 성적 때문이었다. “중간고사를 봤는데, 달달 교과서를 외었어요. 수학과 영어 빼곤 거의 만점을 받았지요. 새벽까지 공부했는데 평균 두 시간이나 잤을까….”

너무 일찍 세상을 경함한 그는 이미 고교시절에 애어른(?)이 돼 있었다. 그 이듬해 AID차관으로 대구 코오롱회사가 지어졌다. 개발도상국 경제개발을 위해 미국이 제공하는 장기융자의 하나였던 AID 차관에 힘입어 준공된 이 회사는 전국의 공업고등학교에서 최우등 학생만 뽑았다. 자신의 처지를 너무 잘 알고 있던 그는 대학을 포기하고 코오롱 입사를 택했다. 그럼에도 대학 진학의 꿈을 놓을 수 없었다. 결국 1년 후 청구대(후일 영남대) 섬유학과에 입학, 주경야독으로 지독하게 세월과 싸워나갔다.

#소년가장 독학으로 대학을 졸업하다   
그 시기에 그에겐 담대한 꿈이 있었다. 회사를 세우는 기업인이 되는 거였다. “내가 앞으로 제대로 살려면 직장생활만 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삶은 고달팠지만 꿈은 풍요로웠고 그것이 내가 버티고 나갈 힘이 되었어요. 매일 밤 나만의 상상력을 동원해 미래를 그렸어요. 회사 이름도 그 때 만들어봤죠. 하하.” 

‘세일’이었다. ‘세계 제일’이란 의미와 기업행위의 기본인 ‘SALE’ 두 가지 뜻을 담았다. 사인도 만들었다. 지금도 쓰고 있는 게 그 때 거다. 1967년, 어렵사리 고교를 거쳐 대학을 늦깎이로 졸업하던 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결혼과 함께 서울로 삶터를 옮겼다.    

“하루는 동아일보를 보니까 삼득무역(지금의 충남방직)에서 사무직을 뽑더라고요. 응시해서  합격했죠. 서울로 올라오는 계기가 됐고 가장으로서의 구실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죠.”

남다른 경험과 책임감, 창의와 열정으로 넘쳐났던 그는 문 닫게 생긴 회사를 회생시키면서 경영인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취업은 했는데 회사는 엉망이었어요. 다짜고짜 사장에게 야전용 침대를 사달라 했지요. 전 직원 모아놓고 말했죠. 회사가 살아야 내가 산다며 6개월을 닦달하니 체계가 어느 정도 잡혀갔어요.” 회사 근처에 방 한 칸을 얻어 아내를 데려왔다. 남다른 열정과 능력에 사장도 보답했다. 1년 후 과장, 2년 후엔 부장으로 승진한데 이어 3년이 되자 공장장으로 임원이 됐다. 출·퇴근 용도로 운전기사가 달린 자가용이 제공됐다. 그의 나이 29세 때다. 

# 드라마와 같은 창업과 경영인의 길 
인생은 세옹지마라 했던가. 일본 출장 도중 갑작스런 회사의 부도소식을 접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꿈 꿔온 창업이라는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다. 1973년, 마침내 동선합섬(주)과 동선모노(주)를 창립했다.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각고의 노력 끝에 당시 독일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 전량 수입으로 의존해왔던 폴리에스터 모노 필라멘트사를 완전 국산화하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판로였다. 일본제품 대리점 사장들이 납품을 막았다. 이윤 때문이었다. 원료 수입만으로 그들은 10배의 폭리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산화 제품의 우수성과 적절한 가격 경쟁력으로 외제가 지배했던 왜곡된 시장구조를 서석홍 대표이사는 마침내 바꿔냈다. 

“우리 회사제품이 날개 단 듯 팔려나갔어요. 마치 ‘제2의 김우중’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꿈을 다 꿨지요. 회사를 여기저기 신축했어요. 용인에도 기흥구 신갈, 처인구 둔전에 공장을 세웠고 모두 6개 사업장에 달했죠. 거침없이 질주하던 시절이죠.” 

100% 토종 자체 브랜드로 수출하면서 동종업계에서 국내외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브랜드의 해외시장 등록이 일부 대기업에서만 이루어지던 설립 초기부터 세계 시장 개척에 나섰다. 중점적인 수출전략과 함께 신기술 개발과 고유브랜드 개발로 홍콩, 대만을 비롯한 동남아를 석권했다. 미국은 물론 호주‧중동‧남아프리카까지 광범위한 수출시장을 확보해 나갔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 P‧P섬유업계 최초 500만불 탑(87년), 1000만불 탑(88년), 2000만불 수출 탑(89년)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3년엔 마침내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인류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다’ 영국 출신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명언은 인생사에도 마찬가지였다. 끝이 없어 보일 정도로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그 때가 1992년이었어요. 직전에 중국과 수교가 되면서 섬유업계가 풍비박산이 났죠. 낮은 가격으로  중국산이 물밀 듯 들어와 갑자기 60~70%까지 시장을 점유했어요. 은탑산업훈장까지 받으며 잘 나가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순간이었지요.” 

용인 3개 공장을 비롯해 6개 사업장, 530여 명 직장이었던 회사는 당시론 큰 규모인 100억 대 대출을 못 이겨 부도 직전에 몰렸다. 은행도 추가 대출 요청에 손사래를 쳤다. 결단을 해야 했다. CEO 서석홍은 ‘버려야 산다’고 생각했다. 좋은 것부터 팔았다, 거주하던 집은 물론 용인 신갈, 용인 둔전, 평택, 서울 사무소까지 잇달아 남의 손에 넘겼다. 6개월 만에 모든 공장을 처분하고 나니 어느 정도 은행 빚은 정리할 수 있었다. 그나마 부랴부랴 남은 기계라도 옮길 곳이 필요했다. 시골 변두리라는 이유로 경매에도 팔리지 않던 백암 땅은 다행히 남았다. 재기의 불씨를 살리는 터전이 돼 주었고 오늘날 성공신화의 산실이 됐다. 

# 서석홍의 또 다른 시선 ‘지역사회와 이웃’
 ‘기술 우선’을 외치던 CEO 서석홍 대표이사가 요즘엔 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이웃과 지역공동체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지난해부터 지역사회와 소외계층을 위한 나눔의 동반자 ‘중소기업사랑나눔재단’ 이사장으로서의 활동이다. 이웃을 향한 진정 어린 중소기업을 발굴해 도움이 필요한 곳에 사랑을 전달하고 있다. 희망드림장학사업, 의료지원사업, 중소기업연합봉사활동, 희망이음사업 등 다양한 활동의 중심에 서석홍 이사장이 있다. 

3월엔 마침내 1200여 회원사의 수장인 용인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취임했다. “기업인들이 4차 산업혁명 물결을 혁신과 성장기회로 삼도록 최대한 뒷받침 하려 합니다.” 기술력을 통한 경쟁력 강화를 외치는 그다운 취임 일성이었다. 용인 지역경제를 꽃 피울 스마트 팩토리 사업 지원 등 당차고 과감한 프로젝트가 추진 중이다. 사람들은 그의 구상을 믿는다. 말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서석홍 회장의 일생이 모든 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리라.  

 

CEO 서석홍의 인생과 경영 리더십 노하우

하나, 기술력과 흔들리지 않는 용기 

“제조업 CEO는 마치 교도소 담장을 뛰는 것과 같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안으로 떨어지고 반대편이어도 추락사이다. 결국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으로만 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떨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핵심 키워드는 뭘까. 나는 기술력이라 말한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셀 수 없는 고난의 시절이 있었다. 혹독했던 위기를 극복하고 오늘에 이른 것은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통한 경쟁력 확보 덕분이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다.”

둘째, 자기 자리를 지켜라

“세상은 자기 자신만 이기면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시험을 패스하며 오를 수 있는 길이 그런 경우다. 돈 버는 것은 생각대로 안 된다. 왜냐고? 모두 잘 살길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길을 올바로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내가 즐거워하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라. 운명과도 같은 자신의 길을 찾고 꾸준히 지켜나가라.”  

셋째, 스스로 이겨나가는 자가 되라

“제조업 40년이 넘었지만 정말 그만두려 했을 때 아들에게 물었다. 미국 MBA(전문경영대학원)를 거쳐 S그룹 기획실에 있던 아들이 ‘해 보겠다’고 하더라. 먼저 기회를 줬다. 물론 쉽지 않은 거였다. 공장 운송부터 시켰다. 수년 동안 가장 힘든 일을 스스로 이겨나가도록 했다. 그러자 어느 날 직원들은 그의 편이 돼 있었다. 물론 회사도 궤도에 올렸다. 그때부터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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