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한 대형마트에 있는 실내놀이터에 가기로 했다. 가는 내내 신난 아이를 보니 뭔가 뿌듯한 생각이 든다. 조잘조잘 무엇을 할 것인지 계획을 말한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거짓말을 조금 보태 딸의 발걸음이 공중으로 붕 뜬다. 곧 날아갈 듯하다.

입장을 위해 이것저것 하고 있는 사이 딸의 ‘완전’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친구를 만났다. 애초 가고자 했던 놀이터 대신 친구와 함께 놀겠단다. 지불한 입장료를 되돌려 받고, 딸과 그 친구 뒤를 따랐다. 인근에 있는 블록방에 가겠단다. 그때부터 딸 인지범위에 더 이상 아빠는 없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자신의 계획 속에서 ‘왕자님’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아빠는 등장도 못해보고 퇴장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고만고만한 나이의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부모를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된 것이 아니다 보니 말 그대로 그냥 아이들 속에 방치된 것이다. 게다가 함께 온 유일한 ‘아는 사람’ 딸마저 ‘아빠’ 한번 불러주지 않았다. 무언가 어색함을 넘어 부끄러움 같은 것이 밀려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더 이상 아이들 속에서 거인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못 참겠다 싶어 잠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시간은 30여분이 더 지났을 터. 혹시 딸이 아빠를 절박하게 찾지 않을까 싶은 걱정에 가보니 상황은 변한게 없다. 부모를 떠나 내내 울기만 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딸이었다. 그 마음도 잠시 ‘어린이집에서 12시간을 저렇게 보내는구나’ 싶은 생각에 미더운 마음이 든다. 그러면서도 뚜벅뚜벅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모습에 솔직히 짠하다. 

그건 그렇고 그 순간 아빠는 할 일이 없었다. 5년여 만에 딸의 일상에 완벽하게 길들여져 진 것이다. 얼른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1시간이 넘어도 눈길 한번 없다. 괜히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잘 놀고 있는 아이 이름을 불러보지만 공허한 대답뿐, 쳐다보지도 않는다. 완벽한 ‘왕따’가 됐다. 

다시 주변을 배회하다 정해진 시간이 끝날 즈음에 맞춰 블록방을 찾았다. 친구는 집으로 가고 딸 혼자 조용히 뭔가를 만들고 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빠가 느끼는 감정은 두 가지였다. ‘이때다’와 ‘안쓰럽다’. 이날 내가 선택한 감정은 ‘이때다’이다. 1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딸과 놀 기회를 얻었다는 설레임이다. 아이도 반긴다. ‘왕따’에서 ‘따’짜가 떨어지는 순간이다. 최소한 10분 정도는 그랬다. 

딸은 처음 가기로 한 실내놀이터에서 다시 시작하잖다. 그렇지 않으면 울어버리겠다는 기세로 쳐다보니 안 된다는 말도 무의미하다. 아니 솔직히 한 시간 여동안 친구에게 빼앗긴 관심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 승낙했다. 

딸은 한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지쳤다. 친구와 어울려 놀던 여운에 아빠와 더 놀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제야 ‘왕자님’이 됐다는 생각도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최근 딸은 아빠에게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날은 “힘드신데 놀아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딸과 비슷한 나이였을 즈음. 선친은 많은 선물을 사주셨다. 친구들보다 특별한 네발자전거, 꿀보다 달고 맛있는 귀하디 귀한 바나나도 박스로. 게다가 남자 아이의 로망인 무전기와 장난감 총은 흐드러질 정도였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장난감이 기억에 알알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선친의 행복 혹은 뿌듯해 하시는 모습도 남아 있다. 

지금 이 순간 아빠의 행복은 아이의 현재와 미래의 행복이다. 딸이 고맙다고 느끼는 그 감정이 행복으로 승화돼 10년이 지나고 또 더 많은 세월이 흘러 소중한 행복으로 남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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