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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정부의 무상의료와 의사파업(상)
  • 이동훈(서울새로운내과 원장, 조지메이슨대 초빙교수)
  • 승인 2018.04.0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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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의 사회주의 정부가 메디케어를 강행하면서 의료계를 위협하는 것을 풍자한 캐나다 신문 만평(1962)

미국 북쪽 캐나다 한가운데 네모난 모양의 서스캐처원이라는 주가 있다. 우리나라보다 6배 넓은 땅에 아메리카 토착 원주민들이 사냥 등을 하면서 살았는데 18세기 유럽인들이 나타나면서 1905년 캐나다의 한 주가 됐다. 넓은 평원과 농토로 많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곡창지대로 번영했으나 1930년대 몰아닥친 전 세계적인 대공황은 서스캐처원에 큰 위기를 가져왔다. 곡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농민들은 궁지에 몰렸고 생계가 곤란하게 되자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열풍이 불었다. 1944년 급진적 복지 정책을 주장하던 사회주의 정당이 지방선거에서 승리했다. 북미 최초로 사회주의 정부가 집권한 서스캐처원에서 큰 변화가 있었고 농민 보호법, 최저임금제, 노조 보호법 등을 추진하면서 주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선거에서 연속으로 승리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1959년 사회주의 정부의 지도자 토미 더글러스는 새로운 보건의료 정책을 발표했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소득이 줄어든 농민들은 병원 가기 어려웠고 맹장 수술비를 닭이나 계란으로 대신 내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었다. 정부가 병원비를 지원해주기 시작하자 그동안 병원 진료를 받지 못했던 환자들이 나타나면서 의사들이 깜짝 놀라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갑상선 종양을 방치해서 농구공만한 상태에 이르러서야 병원에 온 환자도 있었다. 토미 더글러스는 새로운 의료정책이 효과를 거두자 자신만만해졌다.

1959년 12월 라디오 연설에서 무상의료를 추진하겠다는 더글러스의 목소리에 캐나다 의사들은 깜짝 놀랐다. 많은 민영 의료보험회사들은 의사들의 의료행위에 압박을 가하고 분쟁이 있었지만 의사협회를 중심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직접 보험을 운영할 경우 압력 수준은 상상할 수 없다. 서스캐처원 주에는 영국에서 이주해 온 의사들이 많았다. 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 의료기관 대부분은 큰 피해와 함께 많은 부채가 발생했다. 영국 정부는 경영이 어려운 병원을 인수해 국유화하고 세금을 투입해서 의료를 해결하는 영국식 의료제도를 만들었다. 영국 의사들은 반대했으나 경영난으로 의료정책 결정 참여를 전제로 합의했다. 그러나 일부는 영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했는데 캐나다 서스캐처원도 그 중 하나였다. 영국에서 이주해 온 의사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정책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무상의료를 추진하던 더글러스는 의사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반대가 있더라도 강행할 생각이었다. 모든 의사를 정부가 고용해 월급 의사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의사들은 자율적 의료기관 경영을 선호했다. 더글러스의 계획은 의사들의 자율권을 침해할 뿐 아니라 필수 의료를 위축시킬 수 있었다.

캐나다 의사들은 의사협회를 중심으로 단호하게 반대했다.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벌어진 1960년 지방선거에서 더글라스가 이끄는 사회주의 정당은 45.3%에서 40.8%로 지지율이 떨어졌지만 선거에서는 승리했다. 선거에서 승리한 사회주의 정부는 전면적 무상의료 즉, 메디케어를 추진했다. 토론은 신속하게 진행됐고 소수 의견은 과감하게 배제하면서 강제적이며 세금을 투입하는 단일 보험법이 제정됐다. 메디케어가 추진되자 서스캐저원 주 의사들은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메디케어 반대 집회를 열었고 국민을 상대로 위험성을 홍보했다. 의사들은 강제 보험제도가 의료의 자율적인 발전을 막고, 정부 통제는 의료 수준을 낮춰 국민 건강을 위협할 것으로 생각했다. 냉전시대였기에 메디케어는 공산주의 정책으로 비난 받기도 했다. 갈등이 고조되면서 의료계는 파업을 경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도 의사들이 파업을 할 것이라 믿지 않았다.

일부 의사들은 다른 지역으로 떠나기 시작했고 긴장이 높아지면서 국민들의 걱정도 커져갔다.  메디케어 강행을 걱정하던 4명의 여성들은 ‘우리의사지키기위원회’를 조직해 지역을 떠나려는 의사들을 붙잡았다. 사회주의에 반대하던 야당, 언론, 시민운동가 등이 가세하면서 우리의사지키기위원회는 커져갔다. 의사들이 떠나고 의료기관이 없어지면 제3국 의사들이 대신 진료할 수 있다는 불안감과 급진적이고 강경한 정부에 불만이 증가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메디케어 강행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1962년 4월 정부의 메디케어 광고는 의료비 통제 뿐 아니라 의료의 질까지 통제하겠다는 도발적인 내용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수많은 환자를 돌봤던 의료계 불만에 기름을 부었다. 친정부 의사를 중심으로 의료기관을 재배치해 정책 강행을 준비했다. 의료계에 메디케어를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나가라는 최종 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극단적인 대치상황은 끝없이 이어졌다. 서스캐처원에는 각종 소문이 퍼졌나갔고, 큰 병원이 팔리고 의사 수백 명이 지역을 떠날 것이라는 등 민심은 흉흉해졌다.

파업 예고일인 7월 1일이 다가오자 의료계와 정부는 마지막 마라톤 협상을 했다. 메디케어를 인정하면서 의사들이 비보험 진료비를 환자에게 직접 청구하는 문제로 논란이 이어졌다. 정부는 의료법을 다시 바꾸는데 난색을 표시했고 결국 운명의 날이 밝아왔다. 서스캐처원 주의 대부분 의료기관은 문을 닫았다.

언론은 메디케어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메디케어는 모든 환자와 의사들에게 거대한 경제적 권력을 행사할 것이다. 의료법은 항상 기본적인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고, 정부는 권력과 돈을 사용해 시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것이다.”

이동훈(서울새로운내과 원장, 조지메이슨대 초빙교수)  webmaster@yongin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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