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는 아무것도 없던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안성방향 능말정류장 옆에 용인독립운동 발자취 유적인 정주원 의병 교전지를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자 경기도에서는 7일 시흥을 시작으로 22개 부·군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3월 21일 용인시 원삼면 좌항리에서 시작된 용인 만세운동은 각 지역으로 들불처럼 번지며 4월 3일까지 13회에 걸쳐 1만3200명이 참여했다. 왜경과 일본 헌병대에 의한 무력 진압 과정에서 35명이 숨졌고, 139명이 실종됐다. 502명이 부상을 당했고 주동자급 65명이 투옥돼 고초를 겪었다. 당시 옥여 임경재(1872~1907년) 의병장은 의병대를 이끌고 무장 항일투쟁을 벌였다.

독립운동은 해외에서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1920년대에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김혁(1875~1939) 장군은 독립군 양성에도 힘썼다. 남구만 선생의 6대손 남정각(1897~1967) 지사는 1922년 의열단에 가입하며 독립투쟁에 나섰다. 원삼지역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오의선(1889~1931) 지사는 해외에서는 임시정부에서, 국내에서는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원삼 죽능리 출신 오인수(1867~1935) 의병장은 국내에서, 아들 오광선(1896~1967) 장군은 만주에서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하며 무장독립투쟁을 벌였다. 최근 48년 만에 귀향한 3대 독립운동가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 오희옥 지사는 언니 오희영 여사와 함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한국광복군 제3지대 대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렇듯 반외세 구국항쟁 정신이 면면이 이어져 온 용인에는 용인 출신 독립운동가 뿐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유적지와 아픈 역사의 현장이 곳곳에 남아 있다. 경기도에 따르면 도내 항일 독립운동 유산 가운데 건조물과 경관(발자취) 유적 219건 중 용인시는 화성시(30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21건에 이른다.

3·21용인독립만세운동 제99주년을 2주일 앞둔 7일 용인지역 독립운동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처인구 원삼면 독립운동 발자취 유적지를 1년 만에 다시 찾았다.

안내판 설치 불구 관련 정보·이정표 부족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오광선 생가터 표지석과 청룡마을 입구 사거리에 설치된 생가터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오광선 생가터에서 승죽마을 방향으로 600여 미터 가면 애국지사 오의선 생가가 나온다. 하지만 청룡마을 입구 사거리뿐 아니라 어디에도 이에 대한 안내 간판이나 이정표는 없다.

1년 전 갔던 곳이라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2015년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발간한 <발로 찾아가는 용인 독입운동 유적지> 외에 독립운동가와 유적지에 대한 자료를 한 곳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곳(홈페이지 등)은 여전히 없었다. 이 때문에 용인지역 독립운동에 관심 있는 시민과 청소년들이 정보를 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서비스 제공이 필요해 보였다.

애국지사 오의선 선생과 3대 독립운동가 오인수·광선 선생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로 발길을 옮겼다. 죽능리 일대에는 용인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57번 도로 안성방향 청룡마을 입구 사거리에서 ‘독립운동가 오광선 생가터’ 이정표를 따라 어현교를 건너면 죽능2리 마을회관이 나온다. 회관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조금만 가다보면 무장독립군 활동을 한 3대 독립운동가 가문의 한 명인 ‘오광선 장군의 생가 터(죽릉리 827번지)’를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도로변에 있지만 무심코 가다보면 지나치기 쉽다. 다행히 지난해 용인시가 표지석 옆에 용인독립운동유적 안내판을 세워 주의를 조금만 기울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안내판에는 오광선 장군의 모습과 생애를 기록해 놓은 안내문을 볼 수 있다.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오광선 생가터 표지석과 청룡마을 입구 사거리에 설치된 생가터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오광선 생가터에서 승죽마을 방향으로 600여 미터 가면 애국지사 오의선 생가가 나온다. 하지만 청룡마을 입구 사거리뿐 아니라 어디에도 이에 대한 안내 간판이나 이정표는 없다.


오의선 선생 생가(죽능리 669-2번지)로 발길을 옮겼다. 오광선 장군 생가 터에서 승죽마을 쪽으로 600여 미터 가다보면 승죽마을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정류장 맞은편 산 아래 다소 허름해 보이는 주택이 오의선 선생의 생가다. 이 곳에도 역시 용인독립운동유적 안내판이 설치돼 선생의 활동과 어떻게 생가로 정해졌는지에 대해 적혀 있다. 지금은 후손이 세상을 떠나 손자인 오명근씨의 부인 이정희 여사가 홀로 가옥을 지키고 있다. 선생은 1919년 도쿄 한인 유학생들이 중심이 돼 선포한 2·8독립선언과 용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일제의 검거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항일운동 유적 발굴·보존 제도화 필요

오광선 장군의 생가 터에서 승용차로 5분여 거리에 여준 선생이 설립한 삼악학교 터(죽능리 390-1)와 3대 독립운동가 오인수·광선 기적비(죽릉리 삼조 입구)가 있다. 삼악학교는 여준 선생이 오태선·오용근 선생과 함께 1908년 죽능리 능말에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설립한 학교다. 여준 선생은 원삼면 죽능리에서 태어났으며 신민회에서 활동하는 한편, 오산학교에서 교육활동을 하다 용인에 삼악학교를 세웠다. 오인수 의병장의 아들 오광선 장군도 삼악학교를 거여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삼악학교 터 표석은 여준 선생 탄생 150주년과 서거 80주년을 맞아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12년 10월 6일에, 오광선 생가 터 표석은 3대에 걸쳐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선생 일가의 공적과 삼악학교에서 인재양성에 나선 선생의 뜻을 함께 기리기 위해 같은 날 세워졌다. 삼악학교 터 표석이 설치돼 있는 20미터 앞에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유적지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능말 버스정류장 옆에는 그간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정주원 의병 교전지 안내판이 설치됐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지로 일어났던 정미의병 때 의병부대를 조직해 안성 양지 죽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는 등 의병활동을 벌였다. 1908년 7월 일본군에 체포돼 교수형을 받았으나 감형돼 충남 당진에서 은둔하다 1925년 타계했다.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2015년 발간한 <발로 찾아가는 용인 독립운동 유적지>에 기록돼 있는 용인지역 독립운동 유적지 지도

한편, 경기도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잊혀져가는 도내 항일유적지를 대상으로 ‘유적 알리기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도는 올해 1차로 58개 항일유적지에 예산을 들여 안내판과 동판 등 안내표지 설치 사업을 실시할 예정이다. 지난해 경기도가 문헌과 현장조사를 통해 확인한 도내 유적지는 모두 257곳으로 용인, 화성, 안성, 이천, 평택 등 도내 30여개 시군에 산재해 있다.

도는 이들 유적을 중요도, 보존상태, 활용성, 접근성 등을 기준으로 전문가 평가를 거쳐 58곳을 안내판 설치 대상으로 선정했다. 안내판에는 유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 담기며, 표지동판에는 ‘경기도 항일유적지’라는 표시를 담아 유적지 바닥, 건물 벽면 등에 설치된다.

특히 경기도는 2016년 5월 ‘경기도 항일운동 유적 발굴 및 보존에 관한 조례’를 제정한 바 있어 항일운동 유적지가 도내에서 두 번째로 많은 용인시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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