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마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맥주를 즐기기 위해서는 지적 능력이 필요하다. - 스티븐 버몬트(맥주 저술가)

바야흐로 ‘덕후’의 시대가 도래했다. 예전에는 맥주를 마실 것인지 소주를 마실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비교적 단순한 고민이 있었다면 이제는 ‘어떤 맥주를 마실까’ 하는 고민을 해야 하는 시대이다. 그만큼 수많은 종류의 맥주가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며 상품 진열대에 늘어서 있다. 어디 종류 뿐 이겠는가? 같은 맥주라도 캔과 병, 그리고 잔 등 담겨진 용기에 따라 느낌이 너무 달라진다. 이렇다보니 아무렇게나 집어서 캐주얼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이라 여겨졌던 맥주도 선지식이 필요한 ‘덕질’의 대상으로 승격돼버렸다. 맥주 종류만 하더라도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오늘은 맥주의 종류는 잠시 뒤로 미루고 맥주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고대의 맥주는 별다른 용기가 따로 없었다. 잔에 따라서 마시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이점이라면 빨대를 이용해서 맥주를 마셨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발효는 항아리에 담는 방식이라 발효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초파리 같은 벌레들이 많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게다가 정제 기술이 부족해서 곡물 찌꺼기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조명도 변변치 않았던 시대이니 일과 후 저녁에 마시는 맥주 속에는 온갖 불순물들의 선물세트였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주당들에게 빨대는 필수품이었다. 진흙을 굽거나 갈대를 꽂아서 빨대로 사용했고 일부 여유 있는 귀족들은 금속으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양조 기술과 냉장 기술이 발달하면서 맥주 용기는 대부분 캐그(생맥주를 담는 커다란 금속 통) 아니면 유리병이 차지하게 됐다. 새롭게 캔 맥주와 대용량을 위해서 페트병도 등장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 현재까지 캔 맥주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파손의 위험이 적고 적재하기 쉬워 유통 단가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혼자 사는 싱글들이 늘어나다보니 저렴하면서도 가볍게 마시고 버리기 편한 캔의 선호도가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시 병맥주를 찾는 추세가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크레프트(수제) 맥주가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소규모 양조장들은 마치 와인 병처럼 자신들이 만든 개성 강한 맥주를 독특한 디자인으로 표현한 병에 담아 출시했고 이에 대한 맥주 애호가들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병맥주의 가장 큰 장점은 심미적인 즐거움이다. 병을 감싸고 있는 스타일리시한 라벨과 병뚜껑에 오롯이 인쇄된 엠블럼은 아직까지도 인테리어에 사용될 정도로 멋스럽다. 또한 병맥주를 개봉할 때 울려 퍼지는 경쾌한 소리는 모임과 축하 분위기를 한층 더 즐겁게 해주고,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캔 맥주와 달리 출렁이는 맥주의 물결이 청량감을 더해 준다.

맛에 있어서도 캔과 병은 같은 맥주라도 맛이 달라진다. 제조사에서는 맥주를 캔 따로 병 따로 만들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을 부정하고 있지만, 분명한 맛의 차이가 있다. 필자가 실험해 본 결과 가장 큰 맛의 차이는 탄산의 지속성 여부이다. 탄산이 공기와 접촉하며 발포가 올라올 때 금속보다 유리에 닿을 때 발포가 늦어져 탄산이 조금 더 오래 유지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캔은 맥주가 흘러나오는 입구의 모양이 작은데다 캔 뚜껑이 입구 안쪽에 달려서 계속해서 맥주의 흐름을 교란시키기 때문에 탄산의 발포가 극대화 된다. 반면 병맥주는 따르는 기술에 따라 잔에서 거품이 오래 지속되도록 조절할 수 있고, 병으로 마시더라도 입과 혀로 양을 조절하면서 느끼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맛의 차이가 제법 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더운 여름, 갈증 해소를 위해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맥주를 벌컥 벌컥 들이킬 요량이거나 야구장에서 마실 것이 아니라면 조금은 여유 있게 앉아 눈과 혀와 목을 동시에, 그리고 오랫동안 만족시켜주는 병맥주의 즐거움에 빠져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물론 필자도 병을 선호하면서도 가벼운 호주머니로 인해 수입 맥주 ‘4캔에 1만원’ 패키지 앞에서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또한 이것이 직접 빚어 먹게 되는 근사한 핑계 거리도 되니 맥주 앞에 서 있는 내 마음은 늘 이리저리 출렁거리는 갈대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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