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는 언제나 문제아가 온다. 내가 두려움 에너지 안에서 살 때는 교실 문제아에 대해 많은 에너지를 썼다. 그 아이 명단이 오자마자 작년 담임교사를 찾아가 그 아이의 문제 행동을 수집했었다. 그리고 깨알같이 적어 놓았다. 그 아이 부모의 성향, 생활기록부 기록 등을 뒤져서 아이의 행적을 찾아 정리해 놓았다. 그 아이를 맞을 준비를 온통 두려움, 피해를 막기 위한 회피 동기로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그 아이가 교실에서 수업 시간에 장난을 치고, 친구를 때리면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었다. 

“너 한번 만 더 그러면 그 땐…” 
한 아이는 자신 안에 어떤 싹이 있는지 모르는 채 세상에 태어난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환경을 선택할 수 없는 아이는 두려움, 공포에 부모가 준 반응으로 세상을 본다. 부모의 어려움을 모르는 아이는 두려움, 공포에 홀로 울다가 세상을 향해 외로이 투쟁하기 시작한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집중한다. 부모, 친구가 두려움 주기 전에 도망가려 하고, 공포를 주는 듯 보이면 먼저 공격하게 된다. 9살이 되어 교실에 온 그 아이는 친구에게도 공격과 방어 밖에 할 줄 모른다. 어둠의 싹이 이제는 꽃봉오리가 됐다. 사랑받지 못한 마음은 얼음장이 됐다. 그 아이의 어둠에 물을 주고, 꽃을 피운 것은 누구일까? 그 아이 자신일까? 그 아이야말로 누군가에 의해 밝은 빛인 자신을 잃어버렸다. 이젠 그 빛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누구도 봐주지 않아 사라지려고 한다. 어쩌면 한 어린 아이가 태어나 10년을 살았는데 문제아로 낙인이 찍혔다면 우리는 그 아이를 안고 울어야 한다. 

“네 잘못 아니야. 가엾은 아이야, 너는 주는 물 먹고, 주는 대로 피었단다.”
“10년이 되도록 갇혀 있는 너를 돌보지 않은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야.” 
그 한 아이의 마지막 희망은 교실이다. 만약 교사조차 문제아, 나에게 피해를 줄 시한폭탄으로 본다면 그 아이가 자라 이 세상에 던질 것은 어둔 꽃이 주는 악취가 될 수 있다. 나는 이제 가장 측은지심, 연민의 마음으로 그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들아, 지금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그건 1% 뿐이야. 네가 가진 엄청난 99% 힘이 있어. 그리고 그 힘은 아직 깨우지도, 시작하지도 않았어. 올해 넌 그걸 깨울 거야.”
“넌 깨어날 보석이란다. 선생님이 도와줄게. 네 보석들이 보여.”

그 아이의 빛에 최초로 헤드라이트를 비춰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그 아이가 머지않아 자신이 빛나는 싹들에 스스로 물을 주도록 안내해 줄 것이다. 어둠에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 아이이기에 더 측은지심, 연민의 마음을 퍼부어 줄 것이다. 그 아이가 태어나 만든 불안정 애착, 온 세상에 대한 불신, 투쟁, 두려움의 역사로 얼어버린 가슴을 녹여 주고 싶다. 그 얼음이 다 녹는 날, 그 아이가 가진 빛의 싹이 세상을 향해 나오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힘든 아이, 문제아는 이 세상에 없다. 어둠의 싹이 자신인 줄 알고, 고통스런 삶을 사는 한 아이가 있을 뿐이다. 그 아이가 이미 가지고 태어난 빛을 묵묵히 비춰주는 한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까지 그 어떤 아이도 내 사랑의 빛에 녹지 않은 아이는 없었다. 사람의 언 가슴을 녹이는 건 사람만이 주는 지극한 사랑 에너지뿐임을 이제 나는 안다. 

버츄프로젝트는 나에게 문제아를 문제아로 대하는 게 아니라 한 소중한 보석이 앞으로 보일 빛을 보게 만들었다. 머리로 아무리 배우려 해도 지식으로 배우기 힘든 에너지, 가슴이 울려야 채워지는 따뜻한 사랑에너지, 연민의 힘, 겐샤이를 나는 버츄프로젝트로 깊이 체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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