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19년 촉한의 장군 관우는 형주군을 이끌고 북진해 위나라 조조의 군사를 무찌르고 있었다. 관우군이 위기에 처한 조조군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정예부대까지 격파하자 위나라 곳곳에 수많은 반란이 속출했고 조조 역시 벌벌 떨었다. 승승장구하던 관우는 뜻하지 않게 전투 중 화살이 팔에 맞는 부상을 입었다. 당시 명의로 유명한 화타는 관우의 팔을 절개해서 뼈를 긁어내는 수술로 치료했다. 수천 년 전 마비산으로 환자를 마취시킨 뒤 환부를 절개하는 화타의 수술법은 놀랍고 신기하다. 화타의 수술이 효과가 좋았으면 후대에 널리 사용됐겠지만 전설과 달리 마취제인 생초오 등은 독성이 강한 약재로 과용할 경우 사망할 수 있는 위험한 물질이었다. 수술이 성공했다고 해도 미생물에 의한 감염증은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수술 결과는 항상 좋을 수 없었다. 

상처가 덧나지 않고 회복하는 방법을 찾아 잘 치료됐던 선조들의 경험들은 동의보감과 같은 한의서에 기록됐다. 동의보감의 상처 치료법으로 소나무 껍질가루나 초목의 잎을 뽕나무·석회가루를 뭉쳐서 상처에 뿌리는 등의 방법이 있는데 일부는 미신적이고 큰 효과가 없다. 하지만 새로 떠온 우물물로 상처를 씻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래된 물의 경우 세균 번식으로 오히려 상처에 더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강조한 것으로 보여지며 상처에 뿌려지는 석회는 물과 반응해서 세균을 사멸시키는 효과가 있다. 

염탕이라고 해서 소금을 넣어 끓인 물을 식혀서 상처 소독에 사용하기도 했고, 뽕나무를 태워 남은 재를 우려낸 물을 상처에 바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사천해전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었는데, 1년 후 류성룡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깨뼈가 많이 상했고 상처에서 늘 진물이 흘러 밤낮 없이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소독한다”고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는 것을 보면 1년이 지났음에도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소독 개념은 서구도 동양과 비슷했으며 그리스에서는 끓인 물과 포도주로 상처를 소독했다. 검투사들을 치료하던 로마 의사들은 기구를 뜨겁게 소독한 뒤에 부상 부위를 치료했다. 중세 시대까지도 서구의 소독법은 식초나 짚을 태운 연기, 유황 등을 활용했으나 많은 사람들은 상처가 좋아지지 않고 2차 감염으로 고통을 받았다.

소독물질의 일대 혁명 요오드
1811년 발견된 요오드는 소독물질의 일대 혁명을 가져 왔다. 프랑스 쿠르투아가 화약을 만들기 위해 해조류에서 질산칼륨을 만들던 중 보라색 응고 물질을 발견했는데 이 물질이 바로 요오드다. 요오드는 발견된 직후 갑상선 질환 치료용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는데 1829년 프랑스 내과 의사 장 루골이 새로운 요오드 화합물을 만들어 갑상선 주변 임파선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했으나 정작 임파선 결핵에는 큰 효과가 없는 반면, 물에 잘 녹아 의료기기를 소독하는 데는 유용했다. 루골의 용액은 미국으로 건너가 1839년 남북전쟁 당시 부상병들의 상처 소독 용도로 사용됐고 다양한 형태로 개량되면서 소독약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1868년 조선보다 먼저 개항한 일본은 개항 찬성과 반대로 나눠지면서 치열한 내전이 벌어졌다. 전투가 이어지면서 수많은 부상병이 발생했지만 일본 한방의들은 대규모 외상 환자를 치료한 경험이 없었기에 속수무책이었다. 영국에서 파견된 의사 윌리스는 수천 명의 환자 몸에서 총알을 제거하고 외과 수술을 시행해 많은 생명을 구했다. 윌리스의 외과수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요오드 등을 활용한 상처 소독으로 감염증이 줄었기 때문이다. 윌리스의 활약은 일본에 큰 영향을 줬다. 일본 정부는 한방의들을 재교육해 서구적 의학체계로 개혁했으며 1899년에는 4만여 명의 의사가 양성돼 일본 의료 발전에 큰 전환점이 됐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자객의 칼을 맞고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선교사 알렌이 치료한 사건이다. 깊은 상처를 입은 민영익에 조선 한의사들은 송진 등으로 만든 고약을 환부에 발라 회복을 기대했으나 사실상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민영익의 초빙을 받은 알렌은 즉시 명주실로 벌어진 상처를 봉합해 지혈한 후 요오드포름으로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명주실로 상처를 봉합하는 방법은 동의보감에도 기록돼 있으나 상처 감염에 대한 소독 방법은 미생물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한의학으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상처를 꿰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서 꾸준히 상처 소독을 해야 했고, 요오드포름은 전통적인 한약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효과를 나타냈다. 수개월간의 소독과 치료 끝에 민영익은 완치됐고, 이후 조선 정부는 제중원과 경성의학교를 설립했으나 일제 침략으로 더 이상의 발전은 이어지지 못했다.

요오드로 만든 소독약들은 국내에도 들어와 사용되기 시작했다. 요오드팅크를 일본인들이 음차한 옥도정기는 가정 필수 상비약이었으며 붉은 색깔 때문에 빨간약으로 알려졌다. 1918년 미국 존스홉킨스의 의사 영이 머큐로크롬을 소독약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요오드팅크의 단점인 통증이 없고 효과는 더 좋아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수은이 함유된 머큐로크롬은 수은 중독 위험성이 제기되면서 점점 사라지고 최근에는 요오드에 포비돈을 결합해 자극이 적고 효과가 좋은 포비돈 요오드가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간단하게 생각하는 소독이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작은 상처가 생명을 위협했다. 지금도 소독을 적절하게 하지 않을 경우 2차 감염으로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독만으로 모든 상처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며 의사의 진찰을 통해 필요한 부위에 적절한 치료를 해야 한다. 또한 비상시에 대비해서 일반 가정에도 소독약을 구비해두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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