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 시골에 살았던 필자의 바깥사람은 가을만 되면, 어릴 적 밤나무 밑에서 형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피를 많이 흘렸다는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눈썹엔 아직도 큼직한 흉터가 남아있다. 15m 정도의 높은 밤나무에 밤송이가 가득이다.

꽃피고 열매 맺은 지 얼마나 됐다고 어른 주먹만 한 밤송이가 한가득 달려있다. 초록색 밤송이와 갈색으로 변해가는 것이 섞이고, 그 중 벌어진 것도 더러 보인다. 잠시 기다려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투두둑 밤이 떨어진다. 바닥에도 밤송이와 밤들이 뒤섞여 돌아다닌다. 밤송이의 갈라진 모양을 보니 하나같이 깔끔하게 네 쪽으로 갈라져 있다. 그 안에는 2~3개의 밤이 들어있다. 실한 알밤은 이미 다람쥐가 가져가고 사람들이 털어 갔을 터다. 쭉정이 밤은 끝에 작은 나뭇가지를 끼워 숟가락을 만들고 그 위에 빨간 가막살 열매를 올려 맛나게 먹는 흉내를 내본다.

뒷산을 산책하며 다람쥐, 청설모를 보는 기쁨이 참 좋은데, 가을엔 그 기쁨을 자주 느낄 수 있다. 얼마 전 아이들과 숲에 갔을 때도 평소보다 많은 청설모를 봐서 아이들이 많이 좋아했다. 숲에서 동물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하지만 도토리가 많은 참나무 숲에서 멧돼지를 만났던 경험은 뱀을 봤을 때보다 더 무섭고 황당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땐 저절로 몸이 굳어 나무같이 돼버렸는데, 돼지를 자극하지 않고 움직임을 줄여서 반대편으로 걷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하니 알아두자.

땅에 떨어진 밤송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주 옛날, 기록에 의하면 약 2000년 전부터 밤나무를 주변에 많이 심어 키웠다. 국가적 차원에서 권장하기도 했으니, 산중보다는 집 주변 산언저리에서 더 많은 밤나무를 볼 수 있는 이유를 거기에서 찾겠다. 도토리나무는 우리나라 숲의 주된 나무이니까 주인이 따로 없을 것 같은데, 밤나무는 심어서 길렀다고 하니 꼭 주인이 있을 것 같아 뒷산 숲에서 밤을 줍기도 슬쩍 눈치가 보인다. 물론 엄연히 땅주인이 따로 있으니 함부로 밤을 털면 안 된다.
밤나무 열매인 밤은 ‘견과(堅果)’이다. 건조하고 딱딱한 나무 같은 껍질에 싸여있다. 도토리도 비슷하고 개암과도 비슷하다. 해바라기씨, 땅콩 등도 넓은 의미의 견과류라고 한다.

오늘도 점심으로 묵국수를 먹었지만 도토리는 가루를 내어 묵을 만들어 먹는 데까지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든다. 우리 어머니 세대에서 일반적으로 만들어 먹던 음식이, 이젠 더 이상 흔한 음식이 아니게 됐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이 도토리묵의 맛을 진짜로 즐기며 먹을 수 없어지는 것 같아 아쉽다. 개암도 옛날이야기에 ‘딱’ 소리로 도깨비를 놀라게 하는 열매로 아는 정도에 그친 것 같다. 오히려 개암의 영어 이름인 헤이즐넛이 더 익숙하다. 그나마 밤은 옛날이고 지금이고 우리 가까이에서 언제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맛있는 견과이다. 추석 고향에서 언제나 군것질거리로 먹는 간식이고, 추운 겨울 군고구마와 함께 군밤은 한 봉지씩 들고 다니며 먹는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이다.

가을에 밤을 주워 설탕에 절인 후 유리병에 넣어두었다가 겨우내 간식으로 하나 둘 꺼내 먹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가 있었다. 딱딱한 껍질을 벗기면 나오는 속껍질은 그대로 붙은 체였다. 실제로 그렇게 밤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인가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올 겨울에는 꼭 그렇게 간식을 만들어서 아이들과 함께 먹어야겠다.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