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정문 연원과 배출 인물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 나주 정씨 묘역

나주(羅州) 정씨(丁氏)의 공식적 시조는 정윤종으로 알려져 있다. 정윤종(丁允宗)은 고려조에 검교대장군을 지냈다. 옛 문헌을 종합하면 丁씨의 대조(大祖)는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 그는 당나라 사람으로 대상(大相)의 자리에 있다가 당 선종7년(신라 문성왕15년) 우리나라 압해도(押海島)로 귀양 온 후 사면되었으나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그 자손들이 세거(世居)하게 되어 우리나라 丁씨의 연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나주 정씨는 조선 숙종과 경종 연간까지 관향을 압해(押海)로 써오다 영조 때에 압해(押海)가 폐현되고 나주(羅州)에 부속하게 되자 관향이름도 나주(羅州)로 고치게 되었다 한다. 6세의 대까지는 압해(押海)를 중심으로 세거한 것 같고, 7세 정원보(丁元甫)의 대부터 일부가 개성(開城)에서 세거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경오보(庚午譜)에 있으며, 정원보(丁元甫)의 손자인 정안경(丁安景)의 대는 황해도 백천(白川)에서 세거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 문과 급제자 49명을 배출하고 실학을 집대성해 우리나라 학문 발전에 기여 한 정약용을 배출한 우리나라 명가문이 되었다. 조선조에 국가에 기여한 인물을 살펴보면 중종조부터  광해군 시기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먼저 시조 정윤종으로부터 14세손인 월헌 정수강(丁壽崗, 1454-1527)이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책록되었고 대사헌, 대사성을 역임하였고 저서로 월헌집이 있다.

수강의 아들 3형제 옥경, 옥형, 옥정 모두가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옥형의 아들 응두 또한 중종조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했다. 응두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둘째아들 고암 정윤희(丁胤禧1531-158)는 1556년 알성문과에 장원하고 사가독서 한 후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중시문과에 또 장원한 수재로 퇴계 선생의 문인이다.

셋째 윤우는 선조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찰사, 도승지를 역임하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넷째 윤복은 명종시대에 급제 한 후 도승지, 대사헌 등을 지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기 위하여 어가를 따라 가던 중 병사하였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용인 나주 정씨 입향조(入鄕祖)인 동원공 정호선의 아버지가 된다.

그 외 강직한 선비이자 두 분을 예로 보면 정호관은 선조시대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을 때 광해군의 폐모론 부당성을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려 파직된 후 인조반정으로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정언황은 선조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을 당시 광해군이 소현세자 처형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문을 올리어 파직되었다.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로  정약종 정하상, 정의배를 들 수 있다. 정약종은 일찍이 천주교에 입교
1796년 정조19)에 이승훈과 함께 청나라에 들어가 주문모 신부를 우리나라로 모셔와 천주교 전교에 힘쓰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옥사하였다. 정의배는 한학 훈도를 역임할 당시  사형장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 태연한 태도에 감동해 46세에 입교하였다. 입교 후 전도에 노력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하고 만다.

나주 정문에서 여러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였지만 대표적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과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 형제를 들 수 있다.

이들 형제는 용인의 나주 정씨 동원공 파에 속하며 동원공의 네 아들 중 셋째 언벽의 후손이다. 언벽의 묘가 용인에 있었으나 현재는 안산시에 이장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경세유표,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저술하여 우리나라 실학을 집대성한 사람으로 수원 화성 축성시 기중기를 제작하고 화성 축조에 관여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정약전 또한 동원공의 후손으로 흑산도의 어류들을 상세히 조사하여 자산어보를 찬술하여 당시의 흑산도 어류들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용인의 나주 정문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 나주 정씨 정문

용인에 나주 정씨는 처인구 포곡읍 ,역북동 일원에 세거해 오고 있다. 이들은 시조 정윤종으로부터 16세인 정호선의 후손들로 호선의 호가 동원(東園)임으로 동원공 파라 한다. 특히 포곡읍 전대리 가마실에 동원공의 묘와 아버지인 대사헌을 역임한 정윤복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어 인근에서는 나주 정씨라 부르기보다는 ‘가마실 정씨’로 부르기도 한다. 용인과 관련된 나주 정씨 선조들을 살펴보면 맨 먼저 시조로부터 14세손인 월봉 정옥형(丁玉亨 1486-1513)을 들 수 있다. 공은 1513년(중종 8)에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 이조정랑을 거쳐 충청도,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후 병조판서를 거처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한 분이다.

그리고 옥형의 아들 삼양재 정응두(丁應斗)는 1534년(중종29)에 과거에 급제한 후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 하였으며 대사헌 당시 부친의 병 구환을 위하여 사직하기도 했다. 그 후 8도 관찰사를 거쳐 병조판서, 좌찬성, 1568년엔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정옥형과 정응두의 도비가 경기도 문화재자료 9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묘소와 신도비가 처인구 양지면 제일리에 있다.

또 입향조 동원공과의 공의 아버지 대사헌공 윤복의 묘소와 신도비, 그의 후손 정재위, 정의현의 효자정문이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 가마실에 있다. 입향조로 알려진 동원공 정호선(丁好善, 1571-1632호 동원)은 1601년9선조1)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수찬 등을 역임하고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당대의 권신인 이이첨의 아들인 춘천부사 이원엽의 부정을 보고 해직하는 강개를 보인 선비이자 관료였다.

또 입향조 동원공과 공의 아버지 정윤복의 묘소와 그의 후손 정재위, 정의현의 효자정문이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 가마실에 있다. 현재 용인의 나중 정씨 동원공파에서 종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정규승, 부회장에 정해창 등이 시제를 준비하고 조상의 유훈을 후세에 전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곳 출신으로 사회에 공헌한 이로 학교장을 역임한 정해익, 정규현 등이 있으며 현재 전 포곡농협 조합장을 역임하고 용인시의회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시의원 정창진, 서울시 건설국장을 역임한 정규영, 성북구에서 국장을 역임한 정홍진, 용인시 건설국장을 역임한 정해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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