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불게하고 유비와 손권이 조조의 100만 대군을 적벽에서 불태우는 장면은 역사소설 나관중 삼국지의 절정 부분이다. 적벽대전으로 알려진 이 전투는 역사책에는 “역병이 유행해 관리와 병사가 많이 죽어 조조는 군대를 되돌리고,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됐다”고 기록돼 있다. 조조는 유비, 손권 연합군과 전투에서도 패배했지만 전염병으로 많은 병사가 사망했기에 퇴각한 것이다.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괴롭혔던 가장 큰 적은 왜군의 총알이 아닌 전염병이었다. 1594년 4월 20일 이순신 장군의 장계를 보면 조선 수군 1만7000명 중 1904명이 역명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 전사자 수가 100~200명에 불과했으니 얼마나 큰 타격이었는지 알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이라는 끔직한 상황에서는 각종 전염병이 유행하기 쉽고 집단생활을 하는 병사들은 매우 취약한 존재였다. 

전쟁에서 전염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디서든 발생했다. 로마를 공포에 떨게 했던 한니발의 주력부대 4만8000명 중 절반 가까운 2만2000명이 알프스를 넘으면서 각종 질병으로 사망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군보다 질병으로 더 많은 병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한니발의 적수였던 로마군은 늪지에서 주둔하지 않고 야영지를 만들 때 화장실과 위생 환경에 신경을 많이 썼다. 전염병을 막을 수 있었던 로마군은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뿐 아니라 유럽 최강 군대가 될 수 있었다. 

전염병 뿐 아니라 부상당한 병사들의 상황도 좋지 못했다. 부상병과 함께 이동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고 현장 치료도 한계가 있었다. 전투 중 부상병을 후방의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이 나폴레옹의 군대였다. 말이 끄는 마차 즉 앰블런스를 도입, 부상병을 후송해 의료진이 치료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치료받은 환자들의 운명이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고 있었다.

1853년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 사이에 벌어진 크림전쟁은 영국, 프랑스 군이 참전한 복잡한 국제전이었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부상병들은 후방 병원으로 하나, 둘 이송됐다. 그러나 수많은 부상병들이 도착한 병원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엄청나게 많은 환자로 병원은 초만원 상태였으며 병상은커녕 실외에서 텐트를 치고 누워야 했다.

피가 묻은 군복을 입은 채 야영하는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발생했고 수천 명이 사망했다. 이때 영국의 나이팅게일이 38명의 여성 자원봉사자를 이끌고 나타났다. 나이팅게일은 침대 시트와 환자복을 깨끗하게 빨아서 교체하고 하수구의 오물을 제거했고, 환자의 상처 소독을 청결하게 실시해 많은 병사들을 구할 수 있었다.

자동차와 헬리콥터가 등장하면서 전투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은 단 몇 시간 내에 후송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방 의료기관까지 이송은 치명적인 부상병에게는 긴 시간이었다. 경험 많은 의료팀이 전방 근처에서 신속하게 치료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했다. 전선 변화에 따라 이동 가능한 수술실과 병실을 갖춘 ‘이동 외과병원(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MASH)’이 나타났다. 간단한 수술이 가능한 야전병원 개념은 20세기 초반부터 있었으나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체계적으로 시도됐고 한국전쟁에서 본격적으로 운영됐다.

한국전쟁 당시 운영됐던 10개의 이동병원들은 신속한 수술과 치료로 수많은 병사들의 생명을 구해 부상병 사망률을 2.5%까지 떨어뜨리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이동병원은 더 발전해 베트남전과 걸프전 등 각종 전장에서 귀중한 생명을 구하는데 큰 힘이 됐다.

전쟁은 참혹한 일이고 귀중한 생명이 희생되는 상황이다. 한명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각 국가들은 의료분야에 지속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 휴전 상태인 우리나라는 최근 북핵사태 등 높은 위험성에도 의료 지출을 소비라고 생각하면서 절약하려고만 하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의료기관들이 비상시국에 전력을 다해 환자를 치료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투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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